8. 같은 언어를 써야만 친구일까?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었어 (팔찌 그림, 크기 소)

이만큼 살고 보니 인연이란 정말 희한하다. 우연히 비행기 옆자리에 앉으셨던 아주머니와 30년 넘게 이어진 특별한 관계, 정작 나의 데이트 상대도 아니었던 남편과의 40년 결혼생활.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은 이런 뜻밖의 인연들로 이루어진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낯선 곳을 여행할 때 아무에게나 서슴없이 말을 잘 건다. 

사실 서울을 떠날 무렵만 해도 스무 살의 나는 그리 용감한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타지에서 살게 되면서 혼자 뭐든지 헤쳐나가야 한다는 막연한 의식이 나를 조금 용감하게 만든 것 같다.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내가 혼자 여행 다니던 80년대 초 유럽은 버스 노선을 물어보면 같이 가서 버스요금도 내줄 정도로 아직은 사람들이 친절했다. 기차역이나 공항 대합실에서 하룻밤을 지내도 그렇게 무섭거나 처량하지 않았다. 운이 좋아서 아무런 사고가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내 성격 때문에 살면서 수많은 귀한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내가 이바(Eva) 아주머니와 만나게 된 건 그야말로 우연이다. 1980년 3월, 미술대학 2학년을 마치고 둘째 언니 부부가 사는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그때 공항에 배웅 나온 친구가 갑자기 우는 바람에 따라 울다가 훌쩍거리며 비행기를 탔다. 내 바로 옆자리에 외국 아주머니가 앉으셨는데 고소공포증 때문에 창가 자리가 무서우시다며 혹시 바꿔 줄 수 있는지 물으셨다. 나는 흔쾌히 자리를 바꿔드렸다. 서울에서 일본까지 가는 동안 아주머니와 나는 짧은 영어로 얘기를 주고받았다. 아주머니는 오스트리아, 아저씨는 독일분이었는데 아저씨의 60세 생일기념으로 세계일주여행 중이라고 하셨다. 

평소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시고, 여행을 최고의 공부로 여기셨던 아버지의 배려로 나의 일정도 서울-도쿄-하와이-로스앤젤레스-뉴욕을 거쳐 파리로 가게 돼 있었다. 우연찮게 아주머니의 단체관광 일정도 그와 비슷해서 우리는 도쿄에서 하와이까지 또 같은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나리타 공항에서 나를 다시 만나자 아주머니는 무척 반가워하셨다.

도쿄에서는 방송사 주일 특파원인 형부를 따라간 사촌 언니 집에서 신세를 졌지만, 하와이에서는 그야말로 집 떠나서 처음 혼자 이틀을 지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생전 처음 외국에 나가는 스무 살짜리 딸을 혼자 호텔에 묵게 하신 우리 아버지도 참 대단하시다. 아버지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아버지처럼 혼자 낯선 곳을 여행하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하셨던 게 분명하다. 어쨌든 그 아버지에 그 딸이었는지, 나도 그 경험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혼자 식당에 가는 게 내키지 않아 편의점에서 파는 진공포장 파인애플로 몇 끼를 때웠던 것 같다. 그때 어떻게 연락이 되었는지 기억나진 않으나, 이바 아주머니께서 단체관광 일정 중에 포함된 루아우(Luau) 전통 디너쇼에 나를 데려가 주셨다.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일정도 비슷해서 같은 시기에 며칠 머물렀다. 아저씨가 헬리콥터로 그랜드캐니언 구경 가신 날, 혼자 남으신 아주머니는 나를 불러 차를 사주셨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지만 그 시대엔 그 나름대로 만날 방법이 있었다.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뉴욕에 도착한 지 며칠 만에 아주머니께서 보내주신 편지를 받았다. 파리에 오면 한번 놀러 오라는 초대편지였다. 그리고 정말 파리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나는 아주머니가 보내주신 기차표로 독일의 아주머니댁에 가게 되었다. 아주머니는 하노버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힐데스하임(Hildesheim)이라는 작고 예쁜 동네에 살고 계셨는데 파리에서는 침대차를 타고 밤새 가야 할 만큼 먼 곳이었다. 아주머니 덕에 처음으로 1등 칸 침대차를 타 보았는데 혼자 자는 건 물론이고 방안에 세면대도 있었다. 아침에는 승무원이 침대를 넓은 의자로 정리해 주었다. 

아주머니는 기차역에 흰색 벤츠를 타고 마중 나오셨다. 독일 사람들은 실용적이고 사치스럽지 않다더니, 그 차를 20년 가까이 타셨다고 하셨다. 아주머니댁은 자그마하지만 현대적이고 깔끔했다. 앞마당에 살구나무와 꽃나무들이 있었는데 매년 살구 잼을 만드셨다. 

파리에 3년 사는 동안 아주머니댁에 서너 번 더 다니러 갔다. 비엔나 태생인 아주머니는 부활절과 크리스마스를 비엔나에 있는 아파트에서 지내셨는데 그곳에도 초대해주셨다. 내가 갈 때마다 아주머니는 많은 준비를 하셨다. 오후 3시면 예외 없이 지키는 티타임을 위해 직접 치즈 케이크를 구우셨다. 또 단골 차 가게에서 조제한 향이 좋은 차를 산딸기 무늬가 있는 웨지우드 찻잔에 정성껏 따라주셨다. 후에 남편과 내가 비엔나를 방문했을 때 그 차를 한 봉지 선물로 주셨는데 향이 놀라우리만큼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2차대전 중에 결혼하신 두 분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아저씨는 안과의사였는데 작은 병원 건물을 가지고 계셨고, 은퇴하신 후에는 젊은 의사들에게 임대하셨다. 아주머니를 처음 뵀을 때 지금 내 나이와 비슷하셨을 것이다. 그냥 비행기에서 잠깐 같이 앉게 되었다는 인연으로 근 30년이 넘게 나를 보살펴 주셨다. 

1981년 12월, 서울에서 12.12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아버지는 전두환에게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으신 충격으로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나는 더는 부모님의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어 거취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주머니께 그 소식을 알리고 서울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편지를 보냈더니 “아저씨와 나는 너의 재정후견인이 되기로 결정했다”는 답장을 보내셨다. 굉장히 감사했지만 도움을 받지는 않았다. 

파리에서 힘든 시간을 보낸 후 1983년, 남편과 결혼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났다. 파리는 떠났지만 결혼 후에도 나와 아주머니의 편지는 계속됐다. 나는 두세 번 큰아이 둘을 데리고 독일에 뵈러 간 적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동네 친구댁에서 장난감을 빌려다 놓으셨고, 아이들을 친조부모처럼 귀여워해 주셨다.

2000년, 아주머니와 만난 지 20년이 지난 해에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80살 기념여행으로 뉴욕에 오셨다. 당시 우리는 아이들 넷과 뉴저지에 살고 있었는데 우리가 제법 큰 집에서 사는 걸 보시고 무척 대견해 하시는 눈치였다. 처음 아주머니를 만났을 때는 욕실도 없는 6층 다락방에 살면서 1프랑 20짜리 커피 한 잔도 맘 놓고 마실 수 없는 가난한 유학생 처지였으니 왜 안 그러셨겠는가.   

2006년에 두 분을 마지막으로 뵈었다. 월드컵 축구경기가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있었는데 경기 끝난 후 들렀더니 우리를 배웅하시며 생전 처음 눈물을 흘리셨다. 

“내가 너를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몇 년 뒤 아저씨가 돌아가시고 곧바로 아주머니도 따라가셨다. 그런데 나는 죄송하게도 아주머니가 돌아가신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한동안 아주머니의 편지가 뜸했는데 나도 사는 게 바빠서 편지를 못 하고 걱정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독일어로 된 문서 한 통이 도착했다.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떤 항목에서 내 이름과 주소가 명시되어 있었다. 짐작하건대 유서일 것 같았다. 

마침 독일에서 자란 친구가 있어서 번역을 부탁했다. 놀랍게도 정말 아주머니가 남기신 유서였다. 거기엔 내 앞으로 팔찌, 반지 그리고 브로치 한 세트를 남기셨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내가 처음 아주머니를 만났을 때부터 항상 끼고 계시던 바로 그 팔찌였다. 어느 날 팔찌가 보이지 않기에 여쭈었더니 은행 개인금고에 넣어두셨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그 팔찌 마음에 드니? 그럼 나중에 너 줄게” 하셨는데 그냥 듣고 흘렸다. 말씀만이라도 기분이 좋았지만, 솔직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진짜 유산으로 물려주실 줄은 정말 몰랐다. 

아주머니와 나의 얘기를 들고 사람들은 참 희한한 인연이라고들 한다. 내가 생각해도 믿을 수 없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내가 아주머니의 옆자리에 탔던 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었을지 모른다고. 

사람을 만난다는 게 그런 것이다. 우연이 운명이 되는 게 그런 것이다. 내 옆에 앉은 사람에게 마음을 열 때 그런 기적이 가능해진다. 사람들은 흔히 모르는 사람을 경계한다.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고 헤어질 때 연락처 나누는 것을 이상한 일로 여긴다. 물론 이바 아주머니께 자녀가 있었으면 나를 집으로 초대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다 보니 세상엔 참 정다운 사람들이 많다.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나를 보살펴 준 분들이 많이 계시다. 그래서 나는 이바 아주머니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제 나도 남을 도울 수 있는 시간과 여력이 있으니 남을 보살피며 사는 게 맞다. 내가 특별하지 않았을 때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던 그 많은 호의를 나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적은 상관없어, 마음을 기대면 

아츠코(Atsuko)는 파리에 도착해 프랑스 어학원, 알리앙스 프랑세스(Alliance Francaise)에서 만난 일본 여학생이다. 나보다 두세 살 위인 아츠코는 딱 봐도 일본 사람이다. 전형적인 일본인 얼굴에 하는 행동거지도 무척 여자답고 조용한 편이다. 파리에 있는 먼 친척의 아이를 봐주러 왔다고 했다.

독일에서 온 나보다 두세 살 어린 울르리케(Ulrike)도 어학원에서 만났는데 우리 셋은 곧 함께 몰려다니는 단짝 친구가 되었다. 파리의 이방인으로서 불어를 빨리 배우고 싶었던 우리는 공통분모가 많았다. 젊고 가난하다는 것도 포함해서.

그때 내 몸에는 나도 모르게 반일감정이 새겨 있어서 처음엔 아츠코와 은근히 거리를 두고 지냈던 것 같다. 일본인과 친구가 되면 우리나라를 배신하는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부담을 갖고서. 그런데 어느 날 아츠코가 일본이 한국 사람에게 정말 잘못했고 반성해야 한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모든 경계심을 풀었다. 아츠코는 생각이 제대로 된 친구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아츠코는 부모님이 아주 늦게, 그야말로 삼신할머니에게 빌어 얻은 외동딸이다. 서울 우리 집에도 놀러 왔던 아츠코를 따라 나도 도쿄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교외의 아츠코 부모님 댁에서 며칠 머문 적이 있다. 어머니 토모코 상은 마음이 어린아이 같고 잘 웃는 분이었다. 몸이 허약해서 아츠코 하나 간신히 낳아 기르셨고, 남편 켄지 상이 아내를 평생 딸같이 돌봐온 덕에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공주처럼 사셨다고 한다. 음식도 아버지가 도맡아 하셨는데 솜씨가 아주 좋으셨다. 집 안에 있는 화장실은 푸세식이었는데도 전혀 냄새나지 않고 깨끗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아츠코 집에서의 며칠을 따뜻한 환대 속에 지내면서 일본 사람에게 가진 선입견을 확실히 버리게 되었다. 나무로 만든 목욕탕에 몸을 담그고, 다다미방에서 잠자던 장면이 지금도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파리에서 헤어진 후 여러 해가 지나 다시 아츠코를 만났을 때 나는 아이가 셋 달린 엄마였다. 반면에 아츠코는 오래 동거하던 프랑스 남자친구가 자살한 충격으로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위로해주고 싶었으나 감정표현을 억제하는 데 탁월한 일본인 특성대로 아츠코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최근에 울르리케를 통해 접한 소식에 의하면 아버지 켄지 상이 돌아가셔서 상심에 빠진 엄마를 돌보느라고 꼼짝 못 한다고 한다. 평생 부모님의 사랑받는 딸로 산 아츠코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싶다. 

독일친구 울르리케

울르리케(Ulrike)의 집은 파리에서 350km 정도 떨어진, 독일의 메르지그(Merzig)라는 작은 마을이다. 울르리케의 부모님은 숙박업소를 운영하고 계셨는데 방은 하나 정도였고 간이식당에서 간단한 식사와 맥주 같은 걸 파는 곳이었다. 동네 농부들이 일 끝내고 맥주 한잔하고 가는 사랑방 같은 곳이다. 그곳이 얼마나 시골인가 하면 내가 울르리케 집에 왔다는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동양 처녀를 보러 나타났다. 농부 아저씨들은 생전 처음 보는 나에게 술 한 잔을 사주고 싶어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술을 못 마시는 내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 울르리케는 옆에서 비싼 코냑을 받으라고 알려준다. 나는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매상을 올려주려고 코냑 한 잔을 받았다. 그러고는 유일하게 할 줄 아는 독일어로 감사 인사를 했다. 

울르리케 어머니 마틸다(Matilda)는 정말 다정한 분이었지만 불어나 영어는 한마디도 못 하셨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맛있어요, 좋은 아침입니다, 피곤해요, 안녕히 주무세요 같은 독일어 몇 마디를 배웠다. 다행히 울르리케의 큰언니와 오빠는 불어를 곧잘 하셔서 큰 불편 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다른 친구들같이 한국 가는 비행기 표 살 여유가 없었던 나는 파리에 살던 둘째 언니와 형부가 서울로 돌아간 후부터 짧은 명절이나 휴가 때 울르리케의 집에서 며칠씩 지내곤 했다. 집에 가면 늘 식당에서 부모님 일을 돕던 착한 막내딸 울르리케를 도와서 나도 맥주를 뽑았다. 그러면서 우리가 흔히 갖는 차갑고 분명할 것 같은 독일 사람에 대한 선입견도 완전히 깨졌다. 그분들은 한결같이 다정했고 시골은 어디나 시골스러움이 있었다. 울르리케네 집에서 6개월 정도만 눌러살았으면 독일어가 많이 늘었을 것도 같다. 

울르리케는 결혼에 두 번 실패하고 세 번째 만난 좋은 남편과 샤뽀 누아르(Chapeaux noir)라는 호텔을 경영하고 있다. 일전에 남편과 이 호텔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아주 깨끗하고 아담했다. 아침 뷔페에는 음식솜씨 좋은 주인장 울르리케가 만든 수제 요구르트와 잼이 올라온다. 딸아이가 여행길에 친구와 한 이틀 자고 가게 되어 200유로를 들려 보냈는데 극구 받지 않았다고 한다. 오래전 울르리케가 오빠 언니들과 우리 뉴저지 집에서 며칠 자고 간 것을 빚으로 여겼나 보다.  

몇 년 전부터 파리에 자주 가면서 울르리케와의 만남도 잦아졌다. 젊음 하나로 무조건 예뻤던 우리가 40년 세월을 통과하며 할머니가 됐지만, 파리에서의 추억만큼은 박제된 채 그대로다. 우리 생에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기회 있을 때마다 자주 보고 싶다. 세월이 어마어마하게 빨리 간다. 

덴마크에서 온 허디스 

미국이나 유럽의 학생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에 1년 정도 여행을 하거나 그간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경험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영화를 전공하고 싶었던 내 막냇동생의 아들도 대학에 가기 전, 네팔에 가서 인신매매를 막는 비영리재단에서 일하며 다큐멘터리 영상을 찍었다. 

유럽의 학생들이 많이 해보는 경험 중 하나는 오페어(Au pair)다. 오페어는 외국의 가정에 입주해 육아를 도와주며 용돈을 받아 생활하는 프로그램이다. 주중에는 아이들을 돌보고 여가와 주말이면 그 나라 문화도 배우고 관광도 할 수 있어서 인기가 있다. 파리에서 만난 40년 친구 울르리케와 아츠코 역시 오페어로 파리에 온 것이었다. 

우리가 25년간 살았던 뉴저지 몬트클레어에는 덴마크에서 온 오페어가 많았다. 셋째가 태어나자 나도 도움이 필요해 덴마크에서 온 허디스(Herdis)를 소개받았다. 빨강머리에 죽은 깨가 많은 허디스는 상냥하고 예의 바르고 똑똑한 친구였다. 20대 초반이었는데 운전도 씩씩하게 잘해서 큰애와 둘째의 등하교도 맡아주었다. 허디스는 1년 후 돌아가고, 막내가 유치원에 들어갈 때까지 일고여덟 명은 족히 바뀐 것 같다. 오페어들은 1년 예정으로 오지만 목표했던 것을 다 했다 싶으면 돌아갔기 때문이다. 

허디스는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책임감이 있어서 우리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친구다. 그래서 그가 떠나고 나서도 연락을 주고받았다. 허디스가 돌아가고 난 몇 년 뒤에 나는 큰아이 둘을 데리고 유럽에 가게 되었다. 아이들이 한창 레고에 빠져 있을 때라 레고의 본고장 레고랜드 방문을 일정에 넣었다. 간 김에 허디스를 만나는 것도 빼놓을 수 없었다.

우리는 농사가 본업인 허디스 부모님의 초대로 밭에서 나온 채소를 곁들인 저녁을 대접받았다. 잠은 시내에 있는 허디스 언니의 아파트에서 잤다. 나는 선물로 리바이스 청바지 몇 벌을 사다 주었다. 이상하게도 덴마크에서는 리바이스 청바지값이 미국의 두 배여서 인기가 있었다.

허디스가 그야말로 우유를 먹이고 키운 딸아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다시 허디스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친구와 여행 중인 딸아이에게 허디스가 시내에 있는 시어머님 댁 아파트를 며칠 비워준 것이다. 이젠 다 큰 딸 셋을 예쁘게 키우고 있는 허디스에게 뉴욕에 놀러 오라고 몇 번 말했지만 언젠가 오겠다고 하고는 아직 못 왔다. 벌써 30년이 다 된 인연이다. 언제든 오면 정말 잘해주고 싶다. 지구 어느 곳에 살든 사람끼리의 정은 다 같다.  

집 바꿔 여행하기

몇 년 전에 우연히 집 바꾸기 사이트(Homeexchange.com)를 알게 되었다. 영화 <로맨틱 홀리데이>에 나오는 것처럼, 여행할 때 서로 집이나 방을 바꿔 사용하는 것이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회원인데 사이트에 자기 집을 소개하고 가고 싶은 도시와 원하는 날짜를 올려놓으면 문의가 온다. 맞선 보는 자리 같기도 하고, 물물교환 같기도 하다. 나도 이 사이트에 가입하고 한 일 년 동안 네댓 번 집을 바꿀 기회가 있었는데, 두 번은 별로였지만 나머지 두 번은 그로 인해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집을 바꾸다 친구가 된 인연은 이렇다. 스페인 톨레도(Toledo)에 사는 마르가리타(Margarita)라는 여성이 뉴욕에 오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마음이 설렜다. 마드리드에서 40분쯤 떨어진 톨레도는 1980년에 친구와 두 주 동안 배낭여행할 때 들렀던 인상 깊은 중세도시 중 하나다. 그때 우리는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성이 설마 우리가 묵을 유스호스텔일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 고성을 개조해 젊은 여행객들의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요즘 돈 5달러 정도로 하룻밤 자고 간단한 아침까지 먹을 수 있었다. 그런 추억 때문에 나는 마르가리타와 집을 바꾸기로 했고, 그녀가 먼저 우리 집에 왔다.

40대 초반의 예쁘장한 마르가리타는 남자친구 호세(Jose)와 2주 동안 머물렀다. 우리가 빌려준 방은 출입구가 따로 있어서 서로 만날 일이 거의 없지만, 우리는 아침을 차려서 마르가리타를 초대했다. 역시 사람은 먹으면서 사귀는 게 최고다. 스페인 사람들은 대개 친절한 편인데 이 친구가 다정한 성격이라는 것은 만나고 딱 5분 만에 알 수 있었다. 남자친구도 성격이 좋아 정말 나무랄 데 없는 손님이었다.

같이 있는 동안 우리는 두세 번 더 아침 식사에 초대했다. 우리에게는 그저 식탁에 포크와 나이프만 하나씩 더 놓으면 되는 거지만, 여행 온 친구들한테는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일정이 다 끝나 공항 가는 택시를 불렀는데 마르가리타가 말했다.

“Now you have a house in Spain!”

“이제 너도 스페인에 집이 있어!”

마르가리타의 말대로 그해 여름에 딸아이가 친구 두 명과 톨레도에 가서 마르가리타네 아파트에서 며칠간 신세를 졌다. 마르가리타는 스페인 여행에 필요한 정보를 꼼꼼히 조언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드리드 관광을 위해 출퇴근길에 차로 데려가고 데려오기도 했다. 나는 동행하지 않았지만, 딸아이의 보고를 들으며 40년 전의 톨레도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꼬불꼬불한 중세 돌길을 따라 올라가는 언덕길의 예쁜 가게들, 식당과 카페 그리고 곳곳에 성당이 있는 그림 같은 동네였다. 따가운 태양에 눈이 부시고 더웠지만, 돌로 지은 건물에 들어서면 금방 서늘했던 기억도 있다. 나는 후에 남편과 남프랑스를 여행할 때 들러 그리웠던 톨레도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 이후에도 마르가리타는 다시 2주간 우리 집에 왔다. 그때는 우리 바닷가 집에도 며칠 같이 가고, 딸아이가 있는 보스턴에도 함께 다녀왔다. 마르가리타는 작년 8월에도 다시 우리 집에서 열흘간 머문다고 했으나 코로나 때문에 오지 못했다. 자주 온다는 생각이 살짝 들기도 하지만, 언제 봐도 즐거운 그녀를 반기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언어를 써야만 친구일까? 

집을 바꾸면서 친하게 된 마르가리타가 가끔 얘기하던 이탈리아 아저씨가 있다. 언제 한번 움브리아(Umbria) 지방에 사는 토티(Toti) 아저씨 댁에 놀러 가자고 하기에 그러자고 했는데 마침내 같이 가게 되었다. 아저씨 댁이 있는 페루지아(Perugia)는 동네 한복판에 AD 200년에 만든 우물이 있을 만큼 유서 깊은 곳이다. 사람들은 주로 페루지나라는 초콜릿으로 유명한 동네로 알고 있으나 그것 말고도 볼거리가 많은 아름다운 곳이다.

토티 아저씨 댁은 페루지아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었다. 아저씨는 우리를 아주 반갑게 맞아주셨는데 그간 마르가리타가 하도 우리 이야기를 해서 만나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 이탈리아어 실력은 너무 짧았고 아저씨의 영어 실력은 더 짧아 처음엔 소통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구글 번역기를 통해 대충 인사도 하고 나름대로 대화도 시도해 보았다. 그렇게 하루이틀 지나자 우리는 아저씨가 그냥 이탈리아말로 얘기하셔도 대충 눈치로 알아차렸다. 아주 옛날옛적에 그랬던 것처럼 사람끼리니까 통한 건지도 모른다. 짧게나마 배웠던 이탈리아 말을 다음엔 좀 더 공부하고 오리라 다짐했다.

아저씨 댁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부엌에서 아저씨와 친구들이 음식 하는 광경을 자주 보았다. 우리도 초대받아 함께 먹었는데 아저씨는 거의 매일 친구들과 먹고 마시고 식후엔 노래방까지 열었다. 치과의사였던 아저씨는 은퇴하셨는데 신경외과 의사인 부인이 몇 년 전 갑자기 돌아가신 뒤로 더 자주 친구들과 모이는 것 같았다. 들어보니 대부분 유치원 친구였다. 

아저씨는 페루지아가 최고급 식재료인 송로버섯(truffle)의 본고장인데 11월에 오면 숲에 버섯 따러 가자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떠나기 전에 토티 아저씨네 식구 다섯 명을 초대해 동네 식당에서 저녁을 대접했다. 닷새를 신세 지고 떠날 때 우리를 기차역까지 태워주신 아저씨는 굳이 승강장까지 따라오셨다. 만난 지 일주일도 채 안 된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하시며 울먹울먹하셨다. 아직도 아주머니가 떠나신 자리가 허해서 그러셨나? 떠나는 발길이 가볍지 않았다. 뉴욕에 꼭 다녀가시라고 했는데 팬데믹이 덮쳤다. 그래도 언젠가 한 번은 오시겠지. 그때는 아저씨가 우리에게 하셨듯, 정성을 다해 따뜻하게 모시고 싶다.

지금도 우리에게는 ‘페루지아’라는 단체 문자 방이 있다. 남편이 뉴욕에 오자마자 만들었는데 거기엔 토티 아저씨와 친구 피에로(Pierro), 우리가 있을 땐 토티 아저씨와 그냥 친구이다가 요즘 연인이 되셨다는 가브리엘라(Gabriella) 아줌마, 아저씨의 유치원 동창 산부인과 의사 마릴라(Marila) 아줌마 그리고 마르게리타와 우리 부부가 있다. 아저씨와 유치원 친구들은 지금도 뻑 하면 여행을 다니시며 사진을 올리신다. 나이 들면 우리도 그렇게 살고 싶다. 유치원 친구들이랑 오래오래 변함없는 친구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가. 참 부럽다. 

친구가 꼭 나와 같은 언어를 써야만 할까? 가끔은 지구 반대편에 사는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것도 좋은 일이다. 마음만 열면 우리의 여생은 지루할 틈이 없을 것이다. 

프랑스 장 피에르 아저씨 (포도 그림, 크기 중)

살다 보면 가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거리를 두기보다 먼저 마음을 열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 말이다. 

딸이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우리 딸과 딸의 친한 친구 캐시(Cathy)를 데리고 파리에서 남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6월 말이라 날씨도 좋았고 파란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뭉게구름이 인상파 화가의 풍경화를 보는 것 같았다. 

리용(Lyon)으로 가는 길에 우리가 예약한 숙소에 차질이 생겨 딸아이가 급하게 숙소를 찾았는데 리용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시골이었다. 예약 사이트에 ‘영어를 못 하는 주인’이라고 돼 있었지만 내가 불어를 할 수 있기에 걱정 없이 예약했다.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찾아간 곳은 옛날 헛간을 개조한 돌집이었는데 잘 고쳐서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집안도 아주 깨끗하고 현대식으로 편하게 되어 있었다.

집주인 장 피에르(Jean Pierre) 아저씨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아저씨는 식당 기기를 파는 일을 하시다가 은퇴하셨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아직 회계사로 일하고 계셔서 퇴근 전이었다. 우리가 2층의 깨끗한 방 두 개를 안내받고 내려오자 아저씨는 손수 가꾸시는 텃밭에 데려가 이것저것 보여주셨다. 4인 하룻밤 숙박료가 아침 포함 15만 원 정도이니 보나 마나 생활에 보태시려는 게 아니라 다양한 사람을 만나려고 하시는 것 같았다. 

도착한 때가 늦은 오후였는데 근처 식당도 변변히 없어 보여서 우리는 간단한 저녁거리를 사려고 나섰다. 그런데 아저씨가 우리를 붙들어 세우시더니 말씀하신다.

“뭐 변변한 건 없지만 그냥 우리 먹는 거 같이 먹으면 어떨까?”

“물론 좋죠!”

그래서 우리는 저녁 거리 대신 포도주와 케이크를 사 들고 돌아왔다. 덩굴로 덮인 정자 밑에 여느 좋은 식당 못지않은 분위기의 야외용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식당 관계 일을 하셔서 그런가, 아저씨 요리 솜씨도 수준급이었다. 텃밭에서 갓 뽑은 채소로 만든 샐러드, 프로슈토 (prosciutto)와 멜론, 바게트와 고등어 통조림이 전부였지만, 아저씨의 입담에 끝내주는 날씨를 곁들이니 잊을 수 없는 만찬이 되었다.

식사 후 무슨 얘기 끝에 아저씨가 조르주 무스타키(George Moustaki) 이름을 꺼냈는데, 그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 중 하나였기에 우리는 즉석에서 무반주 노래방을 시작했다. 다행히 내가 가사를 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노래들이어서 취하지도 않은 맨정신에 여러 곡을 같이 불렀다. 세상에! 처음 만나 노래까지 부르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는 그만큼 급속히 가까워졌다. 

다음날 아침, 아저씨는 예상대로 기가 막힌 아침상을 준비하셨다. 맛있는 크로아상과 바게트는 동네 빵집에서 갓 구운 걸 사 오셨고, 집에서 딴 과일로 만든 네댓 가지 잼과 친구한테 받았다는 양봉 꿀, 요구르트와 과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사람들과 이렇게 행복한 아침 식사 자리에 앉으면 나는 이런 게 천국 풍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식사 후 우리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아저씨와 헤어졌다. 단 하루였지만 정이 깊이 들었다. 우리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저씨가 문자를 보내셨다. 

“너희가 떠나니까 벌써 보고 싶다.”

딱 하룻밤 묵었는데 아저씨도 만리장성을 쌓은 것 같은가 보다. 미국에 꼭 한번 놀러 오시라고 초대했으나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아저씨가 지나가는 말로 미국 사람들은 일벌레들이고 인생을 제대로 살 줄 모르는 인종 같다고 하셨는데, 뭐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매년 7, 8월이면 누구나 한 달 정도는 뒤도 안 돌아보고 짐 싸서 휴가를 떠나버리는 프랑스 문화를 생각하면 정말 그렇게 말할 만도 하다.

남편이 40대 초반에 잘되는 사업을 접고 은퇴했을 때 주변에서 부러워하는 분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분들 중에 몇은 그때 은퇴해도 생활에 큰 지장이 없을 만한 분들이었다. 다만 용기를 못 내었을 뿐이다. 좋아서 오래 일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너무 늦기 전에 시간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장 피에르 아저씨처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인생의 폭을 넓히며 사는 것도 그중 한 방법이 될 수 있겠다. 

40년 사업 친구 바버라

미국은 코로나로 유통이 마비되고 중국에서 수입하던 전자 칩이 들어오지 못하면서 전자제품 생산이 거의 마비 상태에 들어갔다. 2019년 9월에 집을 사서 수리하기 시작한 큰아들 집은 6개월 이상 공사가 정지되었고, 해제된 후에도 폭등하기 시작한 자재비 때문에 심한 경우 두 배까지 지불해야 했다. 2년 만에 완공을 눈앞에 두고 부엌 가구를 설치하러 온 시공업자가 놀라는 눈치였다. 모든 가전제품이 보통 3~4개월, 길면 6개월 이상 기다려야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샀는지 의아해하는 것이다. 그건 바버라(Barbara)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바버라와 첫 거래를 한 건 1984년이다. 바버라는 우리의 첫 집을 고칠 때 공사업체로부터 소개받은 회사의 판매 담당 직원이었다. 그 후 40년 가까이 판매자와 손님의 관계로 지냈다. 부동산 사업을 하고 나서는 해마다 적게는 네댓 개에서 열 개가 넘는 가전제품을 사 왔으니 지금까지 몇백 건의 거래가 있었다. 그 사이에 바버라의 회사 이름도 두세 번 바뀌었지만 나는 바버라를 믿었기 때문에 늘 그녀만 찾으면 되었다. 그렇게 오랜 기간을 알고 지내다 보니 서로에 관해 잘 알게 되었고, 아이들 결혼이나 손자를 봤을 때는 사진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이제는 그냥 친구같이 되었지만 놀라운 건 우리가 아직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10년 전, 도대체 우리가 언제 처음 만났나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알게 됐는데 바버라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40대 중반이었고 지금은 80이 넘은 할머니다. 의사인 전남편이 너무 애들만 챙기고 자기를 등한시한다고 해서 깨끗이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사람을 잘 믿는 편이어서 바버라가 특히 싼 값에 물건을 파는지는 별로 신경 쓴 적이 없는 것 같다. 임대아파트가 대부분인 우리 같은 경우는 고장 안 나고 서비스 잘 받을 수 있는 회사 제품이면 되는데, 보통 바버라가 추천하는 제품을 사면 별 탈이 없으니 믿고 산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가전제품의 고장이 많아졌다. 올해는 스무 대 정도 바꿔야 했는데 믿을 수 있는 사람과 거래한다는 게 복 받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매번 제일 싼 값에 살 수 있는 것만 고집했다면 이윤은 조금 더 남겼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믿고 마음 편하게 사는 것만 할까 싶다.

팬데믹이 끝나면 미루고 미뤘던 바버라와의 점심 약속을 꼭 지켜야겠다. 몇 번이나 함께 식사라도 하자던 약속이 여러 가지 이유로 미뤄졌다. 40년 가까이 전화 너머로만 거래했다는 게 말이 되나 싶지만, 그래서 우리의 만남은 특별할 것 같다. 우리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은데 서둘러야 할 일이다.

뚜르젤의 친구들 (집 그림, 크기 대)

우리가 어떻게 그 작은 동네 뚜르젤(Tourouzelle)에 집을 사게 되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희한하다. 그냥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모든 지구인이 방에 갇혀 지내는 동안, 남편의 친한 후배가 전화했다. 그 역시 일찍 은퇴해서 같이 여행하곤 했던 친구인데 이탈리아 시골에 허름한 돌집이나 하나 사서 같이 고쳐보자고 한다. 그는 워낙 손재주가 좋아서 웬만한 집수리는 혼자 할 수 있을 정도다. 무조건 오케이 하고 토스카나(Toscana) 지역에서 집을 찾기 시작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 남쪽, 스페인 국경에서 가까운 뚜르젤에 집을 사게 되었다. 집을 직접 본 것은 아니고, 웹사이트의 소개만 보고 샀으니 꽤 모험적인 거래였다. 뚜르젤은 작은 시골 마을이었지만 내가 파리 다음으로 좋아하는 도시 바르셀로나(Barcelona)가 기차로 2시간 거리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또 가구를 몽땅 끼워 판다는 점이 좋아서 비디오만 보고 집을 계약해버렸다. 

집값은 상당히 쌌다. 서울 사람들이 외곽에 작은 전세 아파트를 얻을 정도의 금액도 못 된다. 그것도 또 다른 후배까지 세 명이 공동으로 사게 되니 큰돈이 들지 않아 좋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집값이 프로방스의 다른 지역보다 저렴해서 영국과 파리에 사는 사람들이 이곳에 집을 사서 별장처럼 쓰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처음 집을 보러 간 날은 적지 않게 긴장도 되었다. 영상에서 본 것과 너무 다르면 어쩌나, 동네가 너무 썰렁하면 어쩌나, 뒤늦게 걱정되었다. 다행히 집은 사진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꽤 잘 지은 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고가구들도 좋을뿐더러 너무 많아서 조금 덜어냈으면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보다 더 좋았던 건 이 집이 있는 동네다. 500가구도 채 안 되는 작은 마을이라 변변한 식당이나 가게도 없다. 아침 7시 30분에 근처 마을에 딱 하나 있는 카페로 빵 배달이 오는데, 그것도 전날 주문해야 살 수 있다. 프랑스 사람조차 마을 이름을 처음 들어본다고 할 만큼 깡촌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만큼 이 동네 자연과 사람들이 문명의 손을 덜 탔을 것 같다는 기대를 갖게 했다. 

그래도 이 작은 마을에 와이너리가 네 개나 있다. 알고 보니 이곳이 랑그독 루시용(Languedoc-Roussillon)이라는, 옛날부터 프랑스에서 포도주를 제일 많이 생산하는 지역이라고 한다. 그래서 동네를 나서면 주변이 모두 포도밭이다. 우리 집 앞에서 시작해 여러 마을을 돌아 다시 집 앞에서 끝나는 10km 둘레길도 환상적이다. 동네에서 30~40분 거리에는 좀 더 크고 아름다운 중세 마을들이 둘러 서 있다. 

우리가 동네 사람을 만나 인사를 나눌 때마다 거의 매번 묻는다. 어떻게 이 동네로 오게 되었냐고. 아무 사전 정보 없이 인터넷을 뒤지다 찾았다고 하면 다들 놀란다. 뚜르젤 집은 후배네가 말하기 전까진 꿈도 꾸지 않았던, 선물 같은 집이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받은 선물, 기대하지 않고 풀었는데 마음에 쏙 들어 더 놀라는 그런 선물.

우리 집은 옛날에 아이들 일곱을 가진 아저씨가 집 여덟 채를 지어서 하나씩 나누어주고 함께 모여 살았다는 르 솔(le sol) 중 한 집이다. 그래서 앞마당은 공동명의이다. 아침에 일어나 대문을 열고 나서면 넓은 마당 위로 햇빛이 쏟아져 내린다. 발밑이 흙바닥이어서 우리 어릴 때 놀던 골목 같다. 거기서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아저씨가 살던 때로 돌아가 여덟 가족이 나누는 따뜻한 삶을 느껴 본다.

처음 뚜르젤에 답사차 갔을 때는 우리 집 뒤에 있는 민박집에 묵었다. 주인 웬디(Wendy)는 나보다 서너 살 위인 영국 사람으로 은퇴한 남편과 2년 전에 민박집을 열었다고 한다. 영국보다 해가 많고 여름이 길어서 이사 왔다고 했다. 우리 집 건너편에는 시청 물품 창고가 있는데 도착 이튿날 웬 남자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이사 왔다고 하던데 혹시 쓰레기 봉지를 받았느냐고. 그의 이름은 이반(Ivan). 시청에서 30년 넘게 일하고 있다. 그는 필요 없는 가구의 처리 방법 등,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래 비어 있던 집이라 손 보고 처리할 일이 많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오랜만에 그간 잊고 살았던 시골인심에 마음이 훈훈했다.  

떠나기 전날, 처음으로 동네 카페에 구경 갔다. 테이블 서너 개가 있는 조그만 카페에 사람들이 일고여덟 명 앉아 있었다. 가까이 가니 그중 세 명이 벌써 아는 사람이다. 둘은 웬디와 그 남편 사이몬(Simon)이고 또 하나는 이반. 뜻밖에 그곳에서 만나니 어찌나 반갑던지…. 그들은 우리를 나머지 동네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저기 사바티에(Sabatier) 아저씨 집을 산 제이와(Jay)와 수(Sue)인데 뉴욕에 산대요.”

프랑스 할머니 갤랑드(Gerlande)는 초면에 본인은 이혼해서 혼자 살고 있다며 세세한 가정사를 털어놓았다. 그러고는 지나가던 친구 프레드(Fred) 부부를 소리쳐 부르더니 우리를 소개했다. 프레드 역시 파리에 살면서 여기에 시골집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이반이 백포도주 한 잔을 사주었고, 조금 있다가 영국 부부 데이비드(David)와 발레리(Valerie)가 또 한 잔을 사준다. 값은 한 잔에 1.5유로, 한국 돈 2천 원 정도지만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런 대접을 받아본 게 언제였나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갤랑드 할머니가 이메일주소를 물었다. 다음에 올 때 미리 알려주면 사람들을 좀 더 모아서 소개하겠다고.

그 후 집에 도배와 페인트칠을 새로 하고 필요한 물품을 장만하기 위해 몇 번 더 갔다. 그러면서 뚜르젤이 50년 전쯤 시간이 멈춰 버린 곳 아닌가 하는 상상을 했다. 그곳에서 돌아오면 사람을 경계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열고 사는 뚜르젤 사람들의 인심이 그리워진다. 둘레길을 걸으며 탐스러운 포도송이를 살짝 서리(?)하던 일, 야생 무화과를 따 먹던 일, 멀리 산등성이 너머로 보이던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하늘도. 그런데 그보다 더 기대되는 건 그곳에 사는 이웃들이다. 다음엔 또 얼마나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지혜의 뿌리를 찾아서 

미국에서는 집을 사고팔 때 변호사가 서류를 작성한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부동산 매매 서류를 공증인이 작성한다. 줄리 고티에(Julie Gautier)는 프로방스 시골 뚜르젤에 집을 사면서 만난 공증인이다. 처음 통화하던 날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줄리의 열여섯 살 딸 때문에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지금은 한국학교에서 취미로 한국말을 배우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부동산을 사려면 적어도 3개월은 걸린다. 서류가 거의 다 준비될 무렵 하루는 줄리가 내게 부탁을 해왔다. 어릴 때 서울에서 네덜란드로 입양된 친한 친구가 있는데 친부모 찾는 것을 도와줄 수 있냐는 거였다. 나는 당연히 있는 힘을 다해 돕겠다고 대답했다. 본래 나는 입양인을 만날 때마다 안쓰럽고 괜히 빚진 자의 마음이 되곤 했다. 우리가 도외시한 아이들을 기꺼이 자녀 삼아준 외국 부모들이 고마웠고, 외국으로 간 아이들을 뒤늦게라도 보호해주지 않는 우리나라가 너무 무책임한 것 같아 화가 나곤 했다. 

입양아는 아무리 좋은 가정에서 성장해도 어쩔 수 없이 가슴에 빈자리를 느낀다고 한다. 18개월에 네덜란드로 입양된 지혜도 마찬가지다. 한국을 떠난 지 40년이 지났고 열 살짜리 딸의 엄마지만 혹시나 자신의 아기 시절과 뿌리를 찾을 수 있을까,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친부모 찾기에 나섰다. 

그런데 그게 만만치 않았다. 이미 2005년에 한국에 가서 무작정 자기가 맡겨졌던 보육원을 물어물어 찾아갔는데 무슨 이유인지 서류에 있는 내용을 공유할 수 없다고 해 그냥 돌아왔다고 한다. 한국을 전혀 모르는 스물세 살의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며칠 만에 부모를 찾는 건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혜는 16년 동안 묻어두었던 상처를 딛고 다시 부모 찾기에 나선 것이다.

입양되자마자 양부모가 이름을 김(Kim)이라고 바꿔주었지만, 서류를 보니 한국 이름이 있었다. 박지혜. 1982년 2월 19일생으로 두 살 위의 오빠와 어머니 아버지 이름도 적혀 있었다. 상고머리에 노란 원피스를 입은 가무잡잡한 18개월 여자아이는 보기만 해도 가슴 한편이 시렸다.

그사이 나는 서울의 큰언니와 사촌 시누님께 친부모 찾는 절차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두 분 다 본인이 아니라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한국말이 서툰 지혜를 만나 함께 서울에 전화를 걸기로 했다. 여러 번의 메일과 문자를 주고받은 끝에 나와 지혜는 설레는 마음으로 첫 만남을 기다렸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와 남편은 “지혜”라고 불러주었다. 그렇게 예쁜 이름이 있는데 그간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잖은가. 우리는 사흘 동안 매일 만나며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지혜는 양아버지가 성격이 괴팍하고 난폭해서 스무 살 때 무일푼으로 거의 도망하다시피 프랑스로 떠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숨어 살았다고 했다. 다행히 좋은 남편을 만나 예쁜 딸을 낳고 10년을 살았지만, 5년 전에 독립해 삶을 개척하고 있는 이야기 등, 결코 평탄하지 않았던 세월을 담담히 들려주었다. 그래도 지혜는 길러주신 부모님께 감사한다고 했다. 

지혜는 감기가 채 끝나지 않아 간간이 기침하는 나를 막무가내로 약국에 데리고 가 목 사탕과 감기약을 사서 들려주었다. 동네 장터에서 무심코 반지를 끼어보고 예쁘다고 한마디 했더니 나 몰래 슬그머니 사서 차에 타자마자 ‘선물’이라며 건넸다. 아! 이렇게 다정할 수가…. 비록 5유로짜리 반지였지만 그의 섬세한 마음 씀씀이가 나를 감동시켰다.

지혜를 소개한 공증인 줄리 역시 믿을 수 없게 마음이 따뜻했다. 처음 지혜와 점심을 먹기로 한 날, 줄리의 사무실 앞에 있는 예약이 힘든 맛집에서 만났다. 해산물도 안 먹는 완전 채식주의자인 줄리가 문어, 오징어, 홍합, 성게 요리와 채소 요리 세 가지를 시켜서 남편과 나는 생각잖은 과식을 하게 되었다. 배부르다는데 디저트도 세 가지나 시켜서 정말 배가 터지는 줄 알았다. 남편이 잽싸게 영수증을 낚아채고 웨이터에게 카드를 주자 줄리가 거의 화난 표정으로 웨이터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내가 주인을 아주 잘 아는데 손님이 밥값을 내면 다시는 안 온다고 얘기하겠다!” 

당황한 웨이터가 “그럼 어떻게 할까요?” 하니까 “내가 나가면서 내면 된다” 하는 거였다. 결국 우리는 점심을 대접받고 다음에 뉴욕에 오면 신세를 갚기로 했다. 세상에! 이 사람이 진짜 프랑스 사람이 맞나 싶었다. 줄리를 언니라고 부를 만큼 가까이 지내는 지혜도 줄리 얼굴이 그렇게 무섭게 변하는 건 생전 처음 봤다고 했다.

우리가 파리로 돌아가자마자 지혜로부터 소식이 왔다. 그날이 마침 내 생일이었는데 바로 그날 서울에서 친아버지를 찾았다는 이메일을 받았다고 한다. 거의 자정이 다 되어 보내온 문자는 이랬다.

“아직도 생일이 지나려면 몇 분 남았네요. 생일 축하드립니다. 오늘은 내게도 무척 특별한 날이 될 것 같아요. 서울에서 아버지를 찾았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안타깝게도 엄마와 오빠는 정보가 부족해서 찾을 수 없답니다. 너무 울어서 이제는 좀 자야겠습니다. 내일 전화 드릴게요.”

지혜의 소식은 내가 받은 최고의 생일선물이 되었다. 아버지를 찾게 되었다니 참 잘됐다고 문자를 보냈으나 한편으로는 앞으로 지혜에게 닥칠 일들이 조금 걱정되었다. 지나친 오지랖이겠지만, 왠지 지혜가 아버지와 첫 상봉을 할 때 옆에서 손이라도 잡아주고, 혹시나 정말 좋은 분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뉴욕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탑승하자마자 지혜의 문자가 왔다.

“이모, Safe Flight!”

지혜는 ‘이모’를 한글로 썼다. 

“이모,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그냥 울컥했다.

김치식당 주인, 은영의 슬픈 노래

프랑스 시골집에서 주변을 탐색하던 중에 놀랍게도 2~3km 떨어진 동네 레지냥 꼬르비에(Lezignan Corbieres)에서 김치(Kimchi)라는 한국식당을 발견했다. 식당 문을 열고 처음 들어섰을 때는 잘못 찾은 줄 알았다. 손님은 전부 프랑스 사람이었고 카운터에도 웬 서양 남자가 서 있었다. 게다가 테이블에는 젓가락도 놓여 있지 않았다. 그런데 주방 쪽을 보니 한국 아주머니가 계신 것 같아 일단 주문하고 주방에 인사하러 갔다. 내가 한국말로 인사하자 손을 저어 한국말을 못 한다며 잠깐 부엌으로 들어오란다. 얼떨결에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불어를 했지만 아주 반가운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집 주변에는 정말 동양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대뜸 “열 살 때 입양돼 한국말 못 해요” 한다. “아! 그러세요?” 하고 자리로 돌아왔는데 평소 점심에는 주지 않는다는 반찬을 내왔다. 또 남편이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니까 메뉴에 없는데도 끓여주었다. 

알고 보니 지혜는 예전에 이곳에 몇 번 먹으러 온 적이 있어서 안면이 있는 사이였는데도 그녀가 입양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이상한 건 열 살에 입양된 것 치고는 한국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사연은 이랬다. 아버지의 학대가 심해서 엄마가 은영과 여동생을 두고 집을 나갔는데 그나마 아버지마저 암으로 돌아가시자 보육원에 맡겨졌다. 만 나이로 열 살이지만 알고 보니 며칠 모자라는 열한 살이었단다. 그러면 5학년은 되었을 법한데 어떻게 그렇게 한국말을 싹 다 잊어버렸을까? 입양되었을 때 이야기를 다 듣고 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은영은 처음 프랑스 공항에 내렸을 때 바닥에 앉아 일곱 시간을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울어댔다. 그러고 나서 양부모 집으로 갔는데 그 후 6개월 동안 목에서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게다가 다시 소리를 낼 수 있을 즈음엔 양부모가 한국말을 쓰지 못하게 해서 결국 머릿속에 그 말들이 갇혀 버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만나자마자 자기 이름이 이은영이라고 하는 걸 보니 마지막 정체성은 붙들고 있었던 듯하다. 신기한 것은 고향 부산에서 할머니를 도와 김치 담그던 기억은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은영은 그때 했던 대로 김치도 담그고 한국 음식도 기억을 더듬어서 할 줄 알게 되었다. 은영의 김치는 간이 좀 세서 경상도 김치인 줄 알 수 있었다. 

한국말은 잊었지만 유일하게 기억하는 게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이란 노래다. 밤마다 그 노래를 부르면서 잠이 들었다니 듣기만 해도 가슴이 아팠다. 지금은 결혼해서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는데 지혜와는 달리 어릴 때 기억이 많이 남은 은영은 자기를 버리고 간 엄마를 찾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했다. 너무 아픈 기억이 많아서 한국에도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내게는 입양인과 만나는 일이 종종 있다. 파리에 우리를 보러 왔던 조카 부부가 우리 집 건너편에 새로 연 식당에 다녀왔는데 거기 요리사 중 하나가 어릴 때 한국에서 입양된 사람이라는 얘기를 전해주었다. 집 앞이라 공사를 할 때부터 눈여겨보았는데, 코로나 때문에 거의 2년간 파리에 오지 못하는 동안 이 식당이 미슐랭에서 별 한 개를 받았다. 언젠가 한 번 가봐야지 했는데 마침 조카 내외가 먼저 다녀온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오기 바로 전날 늦은 시간에 들여다보니 예쁘장한 아가씨가 하얀 요리사 복장으로 일하는 게 보였다. 작은 식당이라 들어서자마자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인사를 했더니 “아, 어제 온 그분들 친척이시냐”며 반갑게 맞는다. 이름은 유미애. 근무 중이라 다음에 파리에 왔을 때 꼭 다시 찾아오겠다 하고 식당을 나섰다. 이렇게 예쁜 딸을 어릴 때 포기한 부모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혹시 길에서 잃어버리고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아직도 낯선 이국땅으로 아이들을 보내야만 하는 한국의 현실이 참 안타깝다. 

입양아 알렉스와 메간 (그림, 크기 소)

우리가 살던 뉴저지 몬트클레어에는 한국 사람이 드물었다.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서 거의 유일한 한국 학생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반면에 이상하리만큼 종종 한국 입양아들을 볼 수 있었다. 둘째 아들의 친한 친구인 알렉스(Alex)도 어릴 때 입양되어서 미국 부모님과 살고 있었다. 그분들은 한국에서 아들 둘 딸 하나를 입양했는데 각기 다른 가정에서 태어나 친 형제자매는 아니었다. 그 아이들은 부모가 변호사라서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있었다. 

고등학교 여름방학에 우리 둘째와 알렉스는 내가 다니던 뉴저지 한인교회가 후원하는 한국의 충북영아원에서 두 주 동안 봉사할 기회가 있었다.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아이들을 돌보면서 알렉스는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영아원 봉사가 끝나고 알렉스는 우리 아들과 친정어머니 집에서 지내며 자기를 낳아준 부모의 나라를 경험했다. 엄마는 알렉스에게 용돈을 챙겨 주셨다.

또 다른 입양아 메간(Megan)도 있다. 한번은 교회 친구가 전화해 자기네 단골손님이 한국에서 입양한 딸을 위해 한국학교를 찾고 있다고 한다. 1994년부터 교회 산하 한국학교에서 가르치던 나는 몇 년 뒤에 교장직을 맡게 되었는데, 교사가 모자라 반을 하나 맡아서 가르치고 있었다. 메간은 그때 2학년이었는데 일단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오시라고 해 따로 기역니은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기들 반에 들어가기는 좀 크고, 2학년에 들어가기에는 기초가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메간은 일종의 개인 교습을 통해 어느 정도 읽고 쓰게 되자 주일마다 한국학교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배웠다.

메간의 아버지는 유태인, 어머니는 중국인인데 메간을 애지중지 기르고 계셨다. 엄마가 중국분이라 사람들이 친딸인 줄 안다고 좋아하셨다. 유태인 학당과 중국학교도 다녔는데 메간은 한국학교가 제일 좋다고 했단다. 중학교에 들어가자 더는 나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계속 연락하며 지냈다. 메간은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고려대학교 어학연수원에 다녔다. 마침 그때 나도 서울에 있어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뿌리를 찾으려고 한국을 찾은 메간이 기특하고 조금은 안쓰러웠다.

메간 말고도 한국학교에 두 명의 입양아가 더 왔다. 우리나라는 이들에게 너무 해준 게 없는데, 이들은 뿌리가 궁금해 찾아온다. 최근 뉴스에 2019년에 세계 7위였던 한국의 해외입양이 1년 만에 3위로 뛰어올랐다고 한다. 이제는 대한민국이 선진국 지위를 얻었다는데, 참 부끄러운 성적표다. 오래전, 노무현 대통령이 뉴욕을 방문했을 때 영부인이 뉴욕의 한국학교 교사들을 초대해 월도프 아스토리아(Waldorf Astoria) 호텔에서 교사간담회를 한 적이 있다. 어쩌다 나도 초대받아 가면서 내심 그 미팅에 기대를 걸었다. 기회가 되면 꼭 이런 제안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일 한국 정부가 입양인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한국에 초대해 환대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가정해 보자. 우선 그들의 마음에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데 얼마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훗날 그들이 미국의 여러 분야에서 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어릴 때 자기들을 품어준 부모 나라에 굉장히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을까? 사람한테 투자하는 것보다 좋은 투자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날 20여 명 교사가 호텔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영부인 비서로 보이는 사람이 정말 어이없는 말을 한다. 질문은 절대 삼가해 달라고. 지금 같았으면 한마디 해주고 바로 나왔을 텐데, 그땐 내가 너무 젊었나 보다. 결국, 영부인의 교사간담회 사진 한 장을 위해 들러리를 서고 만 꼴이 되었다. 그날 하필 내 자리가 대통령 부인 옆이었는데 일정을 소화하려고 앉아 있는 영부인도 무척 피곤해 보였다.

파리의 아름다운 청소부 (Paris 그림, 크기 대)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스무 살부터 3년 동안 살았던 파리는 내게 고향 같은 곳이다. 별로 고생을 모르고 자란 내가 처음 부모님을 떠나 가난한 유학생으로 살면서도 매일매일이 시 같고 그림 같았으니 왜 안 그럴까. 파리를 떠나 아이 넷을 낳고 사느라 몸이 멀어졌지만, 마음은 자주 파리를 그리워했다. 시간과 재정에 얽매이지 않는 날이 오면 다시 파리에서 살고 싶었다.      

파리로 이주하지는 못했지만, 3년 전 그곳에 자그마한 숙소를 마련하고 자주 오가게 되었다. 첫해에는 두 달에 한 번꼴로 부지런히 갔다. 4계절이 바뀌는 것을 느끼고 싶었고, 과일을 좋아하는 내가 계절마다 제철 과일들을 먹으려고 부지런히 갔다. 

우리 집 바로 옆에 몽또구에이(Rue Montorgueil)라는 길이 있는데, 관광책자에 소개되는 먹자골목이다. 내가 자주 가는 과일천국(Palais du fruits)은 먹음직스럽게 과일을 담아놓고 “2개에 5유로!”라고 외치며 사람들을 부른다.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듣기 힘든데, 정말 정겨운 풍경이다.

우리 아파트에서 쎙쏘뵈르(St. Sauveur) 길을 따라 몽또구에이로 가려면 꼭 마주치는 사람이 있다. 마르고 자그마한 체구에 앞치마를 두르고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거리를 청소하는 아니(Annie)다. 처음에는 이분이 어떤 집 가정부이거나 동네에서 고용한 청소부인 줄 알았다. 긴 골목을 오늘은 여기서, 다음날은 반대 방향으로 열심히 청소했다. 어느 날은 벽을 닦기도 하고 물을 뿌리며 대단하게 청소할 때도 있었다. 하루 중 어느 시간대에 지나가도 아주머니와 거의 한 번은 마주칠 정도로 청소에 열심이었다. 치매라도 걸렸나? 의아해할 무렵, 하루는 동네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는 아주머니를 보았다. 빵을 사러 가다가 궁금증에 내가 인사를 건넸다.

“항상 청소하시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꼭 한번 인사드리고 싶었어요”라고 했더니, “아! 그냥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니까 청소하는 거예요” 하시는 거다. 세상에! 그런 기준이면 거의 모든 사람이 자기 집 앞을 청소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통성명을 하게 되었다. 자기 이름이 ‘아니’라고 하기에, “우리 딸 이름도 비슷해요, 앤(Anne)이에요”라고 했다. 그 이후로 아니와 아주 반갑게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아니를 볼 때마다 청소를 좋아하는 남편이 첫새벽부터 집 앞을 청소하는 걸 놀린 게 부끄러웠다. 브루클린 시내 한복판에 있는 우리 집 큰길에서 남편이 빗자루질하는 걸 2층에서 내려다보면서 은근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남들이 보면 동네 청소부인 줄 알겠다고. 동네 청소부면 좀 어떤가? 아니 아주머니 덕에 우리는 파리에서 제일 깨끗한 길에 사는 복을 누리고 있다.

유태인 친구 아론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예의범절과 좋은 풍습들이 곳곳에서 사라져가는 동안 고집스럽게 옛날 그대로 꿋꿋이 살아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하시드 유태인(Hasidic Jew)이 그들이다. 이들은 안식일에는 철저하게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음식도 전날 해두었다가 먹는다. 전기 전화는 물론 엘리베이터도 누르지 못해 그냥 걸어서 오르내린다. 그래서 이런 유태인이 많이 사는 건물에서는 이웃들이 엘리베이터가 모든 층에 설 수 있도록 눌러주는 배려를 하기도 한다. 별로 쓸데없어 보이는 율법에 매어 답답하게 사는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안식일이 있어서 하루를 온전히 쉴 수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인간이 일의 노예로 살아갈 것을 예견하고 하나님이 내리신 특단의 예방 조치였는지도 모른다.

안식일인 토요일에 이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지날 때마다 한여름에도 매우 더워 보이는 검은색 정장의 남자들과, 머리를 삭발하고 똑같은 단발머리 가발을 쓴 여자들이 적어도 넷에서 일고여덟 명 아이들을 데리고 회당으로 걸어가는 풍경을 목격할 수 있다.

뉴욕에서 규모가 큰 부동산 회사는 직원의 반 이상이 하시드 유태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어서 지난 30년간 본의 아니게 이들과 거래를 해야 했다. 이들은 심한 경우 남자가 여자와 악수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고맙다고 인사하려다 머쓱해진 적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옷차림을 제외하고는 일반인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데, 최근 큰아들 집을 고치기 위해 계약한 건축업자와 2년 동안 공사하면서 그들이 사는 세상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다. 그중 한 사람인 아론(Aaron)은 홍해의 기적을 일으킨 모세의 형과 같은 이름을 갖고 있다. 이들은 보통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을 따라 이름을 짓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를 이디(Yiddy)라고 부른다. 이디는 반백에 수염을 기르고 귀 옆으로 꼬아 내린 머리 때문에 나는 처음에 우리가 동년배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마흔다섯 살이었다. 또 한 가지 놀라운 건 그 나이에 손자가 벌써 셋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아주 일찍 결혼한다. 20대 초반에 부모들이 정한 배우자를 우리나라의 맞선 보듯 만나서 사귀어보고 좋으면 바로 결혼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아주 많이 낳는다. 이디도 그렇게 일찍 결혼했고 그의 자녀 역시 일찍 아이를 낳아 젊은 나이에 세 손주의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이디는 11남매 중 넷째 아들인데 70대 중반인 그의 어머니는 손자녀가 아흔아홉 명이다. 물론 아직 진행 중이어서 마감된 숫자는 아니다. 어머니가 그 많은 손주 생년월일을 다 기억하시냐고 물으니 물론이라고 한다. 나는 아직은 둘뿐인 손자들 생각만 해도 자동으로 입이 귀에 걸리는데 이디의 어머니는 얼마나 행복하실까.

최근에 이디 아버지가 쓰러져 자리에 누우신 뒤로는 자녀들이 아침저녁 번갈아 아버지를 뵈러 간다. 그때 그의 어머니는 집안에 들어서는 자식을 매번 너 오기만 기다렸다는 듯 팔 벌려 반기신다고 한다. 상상만 해도 기막히게 좋은 어머니다.

그는 요즘에 사람들이 남에게 인색하고, 내 식구가 아니면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자기 집에는 자고 가는 손님을 위해 별채를 따로 만들었다고 했다. 자기의 하나님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잘해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그런 교육을 받았나 했더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했다.

하시드 유태인들이 만 열세 살이 되면 치르는 성년식은 결혼식 피로연 못지않게 큰 행사다. 그냥 구렁이 담 넘듯 법적 나이가 되면 성인이 되는 우리와는 달리, 성년식을 통해 어른이 되는 관문을 확실하게 통과하게 해주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것 같다. 때로는 너무 튀어서, 때로는 너무 미워서 아예 멸종시키려 했던 히틀러 같은 이도 있었지만, 어떻게 자녀를 그렇게 부모 말에 따라 살 수 있게 가르칠 수 있는지 존경심이 앞서는 사람들이다.

오늘은 공사감독 모이쉬(Moishe)가 병원에 갔다. 서른여섯인 모이쉬는 예쁜 애들이 올망졸망 여섯이나 있는 아빠인데 드디어 부인이 일곱째를 낳으러 들어갔다고 한다. 모이쉬 대신 온 이삭(Issac)이 아들 셋. 딸 셋 사진을 보여주기에 “이제 그만 낳을 거냐?”고 물었더니 “그럼 안 되지!”라며 펄쩍 뛴다. 이들이야말로 아이들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자기 먹을 것은 알아서 가지고 태어난다는 우리 어머니의 말씀을 본래 알고 있는 듯하다.

오늘 저녁 메뉴는 뭐야?

1939년에 지어진 몬트클레어 집은 뉴욕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에 있다. 사실 뉴저지에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을 때 평평한 땅에 지어진 집이 아니면 싫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언덕길에 놓인 합당하지 않은 집을 사게 되었다. 집을 살 때도 연분이 있나 보다. 첫발을 들여놓자마자 이건 사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마음이 끌려서 샀지만 60년 된 집이라 고칠 곳이 아주 많았다. 부엌은 노랗고 커다란 꽃무늬 타일의 1930년대 스타일이었고 천장까지 온통 거울로 된 방은 그거 떼어내는 것만 해도 큰 공사였다. 

그때 전기기술자가 키스(Keith)를 만났다. 당시 스물두 살쯤 된 젊은이었는데 우리도 30대 초반이라 금방 친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끼니때가 되면 눈앞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함께 먹어야 하는 남편 때문에 키스는 우리 집 공사가 계속되는 몇 달 동안 같이 먹기 일쑤였다. 씩씩하고 친화력이 좋은 데다 낯도 약간 두꺼운 편인 키스는 공사가 끝나고 철수한 후에도 툭하면 전화해 밥 먹을 권리라도 있는 듯 물었다.

“오늘 저녁 메뉴는 뭐야?”

“왜? 먹으러 오려구?”

그래서 또 같이 밥을 먹곤 했다.

키스는 지금 뉴저지 에섹스에서 제일 평판 좋은 전기 설치회사의 사장님이다. 한때는 쿠바에 있는 여자친구를 사귀어 몰래 유명한 쿠바 시가도 가져다 팔고, 투자도 하면서 떠돌이로 살더니 뒤늦게 마음잡고 결혼해 예쁜 딸과 행복하게 산다. 요즘은 자주 못 보지만 한 상에서 밥을 먹으며 지내다 보면, 오랜만에 만나도 동기간을 만난 듯, 반가운 마음이 남다르다. 

사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는 집에서 일하는 인부들의 식사를 차려주는 게 당연했다. 내가 여덟 살 때 우리 집을 증축했는데 공사하시던 아저씨들이 점심이면 막걸리를 곁들여 식사하시던 기억이 또렷하다. 요즘은 그런 풍경이 사라졌다고 하는데, 남편은 70년대 우리나라 문화를 50년이 지난 지금, 뉴욕 한복판에서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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