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 장수가 된 공학도
남편은 2004년, 지금 생각하면 한창 일할 젊은 나이 마흔넷에 잘되던 사업을 접고 은퇴했다. 그가 살아온 날들을 모르는 사람들은 운이 좋아 일찍 성공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함께 그 과정을 지켜본 나는 이 모든 게 매일매일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20여 년의 보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서울에서 중학교 1학년 한 학기를 마치고 갑자기 낯선 나라에 떨어진 열세 살 소년은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어볼 줄 몰라서 하루 종일 소변을 참아야 했다. 괜히 못살게 구는 아이들에겐 발차기를 날려 브루스 리 흉내를 내면서 자신을 지켰다. 그러다 모처럼 차이나타운 나들이에서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을 보고는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남편은 약점인 영어 대신 잘할 수 있는 과학과 수학을 열심히 공부해 뉴욕에서 시험 보고 들어가는 과학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아이비리그로 불리는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해 부모님의 자랑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졸업하던 1982년에 세계적인 유류 파동이 일어나면서 남편은 장벽을 만나게 된다. 기름과 관련된 회사들이 대거 직원을 감원해야 하는 상황은 화공과를 전공한 남편에게는 치명타였다. 직장을 찾기 힘들었던 남편은 일단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그런데 그의 앞에 또 하나의 걸림돌이 생겼다. 바로 나였다. 나는 프랑스 파리 유학 중에 뉴욕에 들렀다가 한 모임에서 남편을 소개받았고, 장거리 연애 중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고, 정부에 저항하는 야당 정치인들이 잡혀가 고문당하는 등, 우리 집에 다시 정변이 덮쳤다. 그렇지 않아도 가난했던 나의 유학 생활은 더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편은 내가 유학을 포기하고 서울에 돌아갈 처지가 되자, 아무 대책 없이 나와 결혼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직장도 없는 스물셋 대학원생이 하루아침에 가장이 되었다.
남편이 생활전선에 나선 곳은 맨해튼 17번 부두에 있는 풀턴 수산시장(Fulton Fish Market)이다. 지금은 맨해튼 북쪽 브롱크스(Bronx)로 옮기고 그 자리에는 ‘피어 17’(Pier 17)이라는 복합문화공간이 들어섰지만, 풀턴 수산시장은 1822년에 생긴 이후 대서양에서 돌아오는 어선들의 목적지이자 183년 동안 미국 동부에서 가장 큰 수산시장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처음부터 이 명성 있는 시장에서 번듯하게 장사를 시작한 건 아니다.
시부모님은 두 분 다 서울에서 교사였는데 친척이 있는 뉴욕에 이민해 생전 해본 일 없는 생선가게를 차리셨다. 남편은 시간이 나면 부모님 가게에 나가 도와드렸는데 열아홉 살 여름방학 때 서울에 가신 시아버님 대신 한 달간 생선가게를 도맡게 되었다. 남편은 그때 처음 갔던 풀턴 수산시장 풍경이 이상하게 매력적이었다고 했다. 새벽에 고무장화를 신은 장정들이 커다란 쇠갈고리를 어깨에 걸고 욕지거리를 하며 생선 상자를 나르는 모습이 원시적이고 좋더라고 했는데 나로서는 공감되지 않는 얘기다.
아무튼, 결혼하고 부모님 댁에 얹혀살게 된 남편은 시아버님의 단골 도매상이었던 T&S의 줄리 아저씨에게 가게 한쪽에서 장사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에는 한인 소매상이 많을 때라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아저씨는 가게 귀퉁이에 작은 자리를 내주었다. 이익금의 얼마를 떼준다는 조건이었다.
아무 경험도, 계획도 없던 남편은 현장에서 혼자 모든 일을 배웠다. 처음에는 생선튀김을 파는 소매상들에게 필요할 거라는 판단으로 냉동 감자튀김을 팔았는데 내 기억으로 첫 주 매상이 300달러 정도였다. 그 후 주로 냉동 새우를 팔다가 점점 종목을 늘려 바닷가재, 오징어, 문어 등 냉동 해산물을 팔았다. 그렇게 확장하면서 남편 이름의 사업체가 되었고, 연간 200억 원의 매출을 올리게 되었다.
사실 나는 남편의 시장에서의 하루가 어땠는지 잘 모른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겨울엔 볼펜이 얼어서 안 나왔다든가, 추워서 하루 종일 커피를 너무 마셨다든가, 그런 얘기들로 남편이 가족을 위해 추운 데서 무진 고생을 했다는 걸 짐작할 뿐이다. 또 하나, 그가 말하지 않아도 새벽 2시에 출근해 오전까지 일하는, 밤낮이 뒤바뀐 생활을 20년 동안 지속했다는 것 만으로도 그를 무한히 존경할 수밖에 없다. 당시 수산시장을 꽉 잡고 있던 마피아들에게 소위 ‘삥’을 뜯기며 버텼다는 것도 은퇴 후 알았으니 참 쉽지 않은 세월이었을 것이다.
마피아와 관련해서는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있다. 루돌프 줄리아니가 뉴욕 검찰총장에 부임하고 마피아 소탕에 나섰을 때, 남편도 FBI에 불려간 적이 있다. 여러 날 강압 수사가 계속되었는데 남편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고 몇 달 후, 마피아 대부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느 장례식장에서 만나자고. 그날 남편은 “혹시 내가 안 돌아오면 경찰에 연락하라”고 마치 영화 <대부>의 한 장면 같은 말을 남기고 나갔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그 대부는 함구해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살면서 누군가 귀찮게 굴면 자기를 찾아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이건 뉴욕 바닥에서 아무도 남편을 건드릴 수 없게 든든한 뒷배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지금까지도 조카들이 가장 흥미롭게 들어주는, 그야말로 전설 같은 이야기 중 하나다. 그래서 남편은 아직도 농담 삼아 “우리 귀찮게 굴면 큰코다친다”고 흰소리하곤 한다.
20년 넘는 세월 동안 남편은 한결같이 땅콩버터와 꿀을 바른 호밀 빵 샌드위치 두 개를 싸 들고 새벽 시장으로 출근했다. 밤낮이 바뀐 삶이 힘들어 더 계속하고 싶지 않다는 게 그만둔 이유였지만, 그의 성실한 삶이 이룬 열매가 있었기에 마흔넷의 이른 은퇴가 가능했다.
우리 어머니는 잠시 하고 말 줄 알았던 생선 도매업이 계속되자 “내가 컬럼비아 대학원생인 줄 알고 결혼시켰는데 결국 생선장수였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남의 이목이 굉장히 중요한 한국 사회의 사고방식을 생각하면 엄마의 마음을 백번 이해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신의 학력이나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기회를 도전으로 바꿔 열심히 일한 남편이 참 고맙다.
밥값은 네가 내라
농담이겠지만 며느리들이 ‘시’ 자가 들어가는 건 시금치나물도 안 먹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들만 둘이던 집에 시집가 시부모님께 귀여움받은 기억밖에 없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1973년에 뉴욕에 이민 오신 시부모님께서는 경험도 없이 친구와 맨해튼 한복판, 72가 브로드웨이에 생선가게를 차리셨다. 다행히 장사가 잘되어 내가 결혼했던 1983년에는 브루클린으로 옮겨 십 년째 가게를 운영하고 계셨다.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로서 중학교 국어교사였던 아버님과 맞벌이를 하셨던 어머님은 미국에 오실 때까지 집안일은 거의 안 하신 것 같다. 이민 후에도 가게에서 같이 일하시느라 요리에는 자신 없어 하셨다. 자연히 식구들 밥은 라면도 제대로 끓여본 적 없는 알량한 내 소관이었는데 워낙 겸손하신 성품 때문에 늘 “네가 한 게 더 맛있다”고 칭찬만 하셨다.
우리 막내아들이 스물두 살 되던 해에 잠깐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어느 날 아들이 결혼해 우리 집에 들어와 산다면 어떨까? 눈앞이 아찔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 신혼 시절, 동네에서는 시어른을 모시고 사는 착한 며느리로 생각했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시부모님이 철부지 자식을 하나 더 기르신 셈이다,
식구는 같이 살아야 한 가족이 된다는 아버님 말씀에 동의해 결혼하자마자 시댁에서 살았지만, 사실은 독립할 능력이 안 되어 다른 방법은 생각할 수 없었다. 1년 반 후에 시부모님이 살림을 내주셨는데, 아버님 말씀처럼 그때 함께 살았기에 진짜 가족이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집안 내력과 가풍, 남편이 자란 환경을 알게 되어 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건 우리 결혼식 비용을 시댁에서 도맡아 부담하신 것이다. 당시 친정아버지는 전두환에게 고문당하신 충격으로 뇌출혈로 쓰러지셨다가 회복되신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그 여파로 가정형편이 급격히 나빠져 남편에게 오메가 시계와 양복 한 벌, 시부모님께 한복 한 벌씩 해드리는 것도 벅찬 형편이었다. 시어머님께서는 잘 키우신 딸을 보내주셨으니 전적으로 우리 집 행사라면서 약혼식부터 신혼여행까지 모든 비용을 내셨다. 그리고 오히려 우리 부모님께 명품 코트와 핸드백을 선물하셨다. 결혼 문화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던 나는 몇 년이 지난 후, 사촌 동서들이 시댁의 친척들에게까지 예단을 해 온 것을 보고 내가 얼마나 기본 격식도 못 갖추고 결혼했는지 알게 되었다.
시어머님은 양띠였는데 정말 양처럼 순하셨다. 생전 남의 욕은 못 하셨고 늘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셨다. 두 분 다 지나치다 싶게 인심이 후하셔서 누가 좋다면 다 내주셨다. 생선가게에는 주 고객이 흑인이었는데 어쩌다 한국 사람이 오면 생선을 한 보따리씩 싸주셨다고 한다.
남편이 자라면서 아버님께 거의 세뇌될 만큼 자주 들은 이야기가 “밥값은 네가 내라”는 말씀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나도 결혼 후 여러 번 들었다. 결혼 초 뉴욕에 살던 셋째 언니와 대학병원 레지던트이던 형부랑 같이 식사하러 가는데 아버님은 남편에게 돈을 쥐여주시며 당부하셨다.
“레지던트가 무슨 돈이 있겠냐. 밥값은 네가 내라.”
아무리 레지던트가 박봉이라도 그렇지, 학생보다 낫지 않나?
아버님은 사람을 잘 믿으시는 탓에 사기도 몇 번 당하셨다. 그러면서도 좋은 가게 자리를 아는 분께 양보하시고, 심지어 싸게 나온 건물 사려던 것을 다른 분께 소개해줘 남편이 속상해하기도 했다. 그런데 흉보면서 배운다고, 남편도 별반 다르지 않다. 누구보다 앞서서 밦값 내는 것으로 둘째가라면 서럽고, 누가 좋다 하면 자기가 필요한 것도 그냥 줘버리는 바람에 어떤 때는 미리 다짐해 두어야 한다. 이러이러한 것은 좀 자제해달라고. 간혹 남편의 어이없는 선심에 툴툴거리기도 하지만, 쪼잔한 것보다야 낫겠지 하는 마음으로 봐 넘긴다.
누구에게나 드라마는 있다
누구의 인생에나 굴곡은 있게 마련이다. 우리 부부도 예외는 아니다. 40년을 함께 살면서 두 번의 커다란 파도타기가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잘 버텨준 남편과 나 자신이 기특하다.
첫 번째 파도는 30대 후반, 넷째를 낳고 학교로 돌아가 공부할 때였다. 결혼 때문에 못다 한 학사과정을 끝내고, 지도교수의 권유로 언어학 석박사과정을 막 시작했을 무렵이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일주일에 두 번씩 하루 종일 몰아서 강의를 듣는 동안 남편은 엄마 없는 네 아이를 데리고 햄버거집으로, 피자집으로 데리고 다녔으니 다들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아버님의 전화를 받았다. 갑자기 건물을 인수하게 되었는데 우리가 보증을 서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내용을 알아보니 거의 사기를 당하시는 게 틀림없었다. 그때로부터 12년 전쯤에도 어떤 분의 주선으로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우리 집을 담보로 대출받게 하신 일이 있었다. 다행히 그때는 물질적 손해 없이 해결되었으나 정말 이해되지 않는 경험이었다. 이번에도 똑같은 분이 주선했는데 변변한 계약서도 없이 구두로 합의를 보고 이미 상당한 돈을 건넨 상태라고 하셨다.
은행 감정서를 보니 시가 40억 정도 하는 건물이었는데 이미 여러 건의 담보 설정이 되어 있어 남의 빚까지 다 떠안을 판이었다. “저는 절대 보증 못 섭니다”라며 울먹이는 내가 딱했는지 은행 담당자가 설명했다. 은행에서도 이자가 계속 연체되어서 당연히 건물이 넘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가 그 빚을 도맡겠다고 나타났고, 그게 바로 우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보증을 서지 않으면 아버님이 지금까지 투자한 돈을 다 잃게 되고, 보증을 선 후 아버님이 빚을 못 갚으시면 고스란히 우리의 책임이었다. 그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시는 시부모님을 거역할 수 없어서 우리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40억의 빚을 물려받게 되었다.
건물에 들어있던 식당은 아무것도 모르는 주인들이 나타나자 매니저들이 속임수를 쓰는 바람에 한 달에 5만 달러 이상 적자가 났다. 1년 이상 회삿돈으로 건물의 적자를 막다 보니 남편의 회사 재정까지 흔들리게 되었다. 우리는 어떤 액수가 누구에게 오갔는지 본 적이 없는데도 오롯이 그 빚을 갚을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처음에 같이 투자했던 친척분께 전화를 드렸다. 더는 우리 힘으로 적자를 메우기 어렵고, 이 상황이 계속되면 건물이 은행에 넘어갈 것 같다고 도움을 청했다. 돌아온 답은 냉정했다. 단 한마디로 “너희 이름만 빼면 될것 아니냐!” 하시고는 끊으셨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은행엔 씨도 안 먹히는 얘기였는데….
사실 이 일이 일어났던 당시가 우리 자산이 제일 안정적으로 불어나고 있던 시기였을 것이다. 남편의 사업이 10년을 넘어 자리를 잡았고 그동안 건물도 장만할 수 있었다. 아이들 넷 앞으로 대학 학자금도 넉넉히 넣어두었는데 이 일에 휘말려 다 털어 쓰게 되었다. 이 건물이 넘어가면 빚 때문에 내 건물도 처분해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1년 넘게 고생한 뒤 다행히 식당을 인수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서 그나마 우리는 파산을 면할 수 있었다. 나는 남편이 1년 동안 체한 것 같이 소화가 안 되었고 그 건물 근처에도 가기 싫었다는 말을 나중에야 들었다. 나보다 남편이 더 힘들었나 보다.
앞이 캄캄할 때마다 이상하게도 우리 부부는 “애들만 건강하면 됐지 뭐” 하며 서로 위로했다. 사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됐던 막내는 식당을 살려보겠다고 새벽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엄마 때문에 생후 일 년을 멕시코 보모 레고리아 손에 컸다. 오죽하면 과일 이름들을 스페인어로 먼저 배웠을까. 생각하면 막내에게 진 빚이 많다.
두 번째 시련은 더 크게 왔다. 내가 좋아하는 복음성가 중에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나오리라”는 가사가 있다. 욥기 23장 10절에 나오는 구절이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실 때 딱 우리 생긴 대로, 그분의 방식대로 만나주신다고 믿는다. 그렇게 힘들었던 첫 번째 시련도 나와 남편을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는 하지 못했다. 나같이 씩씩하고 꿋꿋하며 뭐든지 내 힘으로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주 세게 흔들어야 한다는 걸 하나님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어마어마한 사건들이 한꺼번에 터질 수 있었는지 모른다. 마치 영화 <퍼펙트 스톰 perfect storm>의 폭풍처럼, 모든 조건이 한꺼번에 맞아떨어질 때만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2008년에 일어난 세계금융위기의 여파로 시작되었지만, 그와는 상관없는 일들까지 한꺼번에 일어났다. 간단히 얘기하면 그때 가지고 있던 건물 중 세 개가 제각기 다른 이유로 거의 한날한시에 무너져내리게 되었다.
맨해튼 센트럴파크 옆 중심가에 있던 건물은 한 대에 3억 원 정도 하는 피아노를 팔던 가게였는데 금융위기로 주 고객이었던 월가(Wall Street) 손님들이 피아노를 못 사게 되자 임대료를 낼 수 없게 되었다. 가게 위에는 아파트도 있었지만 융자금의 절반 이상을 이 가게가 감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한 달에 2만 달러씩 적자가 날 상황이었다. 또 다른 건물에서는 세입자 중 하나가 나도 모르게 불법으로 호스텔(hostel)을 운영한 바람에 갑자기 시로부터 빌딩 전체를 비우라는 행정명령이 떨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에 우리는 브루클린 덤보라는 옛날 창고 지역에 소극장과 갤러리를 건축 중이었는데 연달아 주변에서 벌어지는 부실공사 현장이 언론에 보도되자 모든 공사 허가가 중단되고 절차가 까다로워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허가 하나 변경하는 데도 몇 달씩, 몇 년씩 걸리는 게 보통이었다. 정말 손발을 묶으셔도 이렇게 꼼짝 못 하게 묶으실 수가 없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제야 그동안 바빠서 잘 참석하지 못했던 성경공부와 새벽예배에 나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시간 여유가 생겼고,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왜 우리 인간들은 꼭 밑바닥으로 내쳐져야 하나님을 찾는 걸까?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는 그 폭풍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다. 50년을 정말 자신만 믿고 살아온 내가 처음으로 내가 누군지, 얼마나 나의 자리를 모르고 까불고 살아왔는지 깨달았다. 자주 들어서 흘려 버렸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마태복음 말씀이 갑자기 가슴으로 이해되었다. 나에게 얹힌 짐이 너무 무거워 내려놓고 쉬고 싶었으면서도 그 짐을 지킨다고 지고 있었으니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이 모든 일 중에 제일 감사한 건 하나님이 나와 남편을 거의 동시에 같이 만나주셨다는 거다. 사실 믿지 않는 집에서 자란 남편 때문에 알게 모르게 핍박(?)을 받은지라, 이제 우리가 함께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신 게 정말 좋았다. 거의 3년의 광야 생활이 끝날 때쯤 기적처럼 우리의 자산은 폭풍을 만나기 전으로 회복되었다.
무지개가족의 마음 둥글리기 (부부 그림, 크기 소)
남편의 표현대로 우리 가족은 그야말로 무지개가족이다. 큰 며느리는 중국 상하이 태생, 둘째 며느리는 파란 눈의 금발인 미국 태생. 셋째 넷째도 아직 한국 친구들을 사귄 적이 없기에 일찌감치 한국 사위, 며느리 볼 기대는 접었다. 그래서 자식이 외국인과 결혼을 앞둔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다.
“우리 남편과 나는 같은 언어를 쓰는데도 말이 안 통하잖아. 그 사람도 때론 외국인 같아.”
이제는 웃으면서 하는 얘기지만 처음 결혼했을 때 우리는 엄청난 문화적 차이를 느꼈다. 지극히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란 남편과 반대로 지나칠 만큼 민주적인 가정에서 자란 나와의 문화 차이란 외국인끼리 결혼한 것만큼이나 컸다. 개인적인 성향이나 바이오리듬도 정반대여서 어떻게 서로 좋아했는지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들다.
일단 동이 트면 일어나는 아침형 남편은 밤이면 생기가 더 살아나는 올빼미형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를 그냥 아침잠 많은 게으른 여자로 치부해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했고, 결국 30년 가까이 치열하게 치른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었다. 결혼 35년이 지났을 때 큰아들이 결혼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기다리시는 가족 점심 모임에 한 시간이나 늦게, 아무 갈등 없이 늦잠 잔 며느리를 데리고 웃으며 나타났다. 이런 큰아들을 보면서 그제야 남편도 나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것 같다.
또 한 가지는 정리 정돈을 아주 좋아하는 남편과 뭐든지 대충대충 느긋하게 사는 게 몸에 밴 나와의 충돌이었다. 살림은 내가 하는데 내 영역까지도 남편이 정리를 하는 바람에 부엌살림이나 재료들이 어디에 있는지 심심찮게 찾아야 했다. 예를 들면 파스타 국수도 내가 둔 자리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가지런히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부엌 장 높은 곳에 넣어두었다. 어느 날 그 사실을 모르고 요리하다 한참 찾아 헤맸다. 이건 사용자의 편의를 전혀 생각지 않은 일종의 독재나 다름없다. 이처럼 사용자와 정리자가 다를 경우에 일어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집안 곳곳에서 벌어진다. 그래도 남편 덕에 우리 집은 늘 잘 정돈되어 있고 손님 맞을 때 급히 치워야 할 일은 없으니 한편으로 고맙다.
우리 부부의 이런 뼈아픈(?) 역사를 모르는 주위 사람들은 우리가 처음부터 잘 맞았으리라 상상한다. “아니, 30년 투쟁 끝에 이만큼 이룬 거예요!”라고 말해도 대수롭지 않게 듣는 눈치다.
우리 어머니가 예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마음은 본래 네모인데 상처받을 때마다 모난 귀퉁이가 하나씩 떨어져 나가 언젠가 동그라미가 되고, 그땐 마음이 둥글고 원만한 사람이 되어 마음 상하지 않게 된다고.
네모로 만난 우리가 이젠 동그라미가 되었는지 요즘은 젊었을 때보다 훨씬 상대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다. 그래도 가끔 부부싸움이라는 걸 하고 있으니 아직 완전한 동그라미는 아닌 게 확실하다.
대물림
욕하면서 닮는다는 말은 주로 나쁜 면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좋은 면이라도 지나치면 부족한 것만 못한 경우가 있으니 이때도 욕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해당할지 모른다. 어릴 때 늘 객식구로 붐비는 집에서 자라면서 어머니의 치마폭이 너무 넓은 것 같아서 불평이 나올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우리 부모님의 삶을 따라 하는 걸 느끼면서 욕하면서 닮는다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여섯 자매만 봐도 나보다는 상태(?)가 좀 낫지만 결국 부모님의 유전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산다. 일단 자매끼리는 네 집, 내 집 없이 장기투숙하는 게 아무렇지 않다. 미국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미국으로 오가다 보니 자연히 오래 머물게 되는 것이다. 자매뿐 아니라 자매들의 친구까지도 언니 동생 하며 지내면서 자매들의 집을 내 집인 양 가서 신세 지라고 한다. 심지어 별 관련이 없는 남들에게까지 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솔직히 우리가 자랄 때 집에 객식구가 많은 게 별로 좋지 않았다. 특히 발냄새 나는 청년이 여럿 같이 산다는 게 불편하기도 했다. 식구가 많으니 오롯이 내 방을 가져본 적도 없어서 자기 방 있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식탁은 늘 돗데기시장처럼 시끌벅적해서 우리 식구만 오붓이, 조용하게 밥 좀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손님이 자주 드나드는 환경에서 자란 우리 아이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엄마 이번 주말엔 누가 와?”
아이들이 묻곤 했다.
“오긴 누가 와? 아무도 안 오지.”
그런데 별로 믿어주는 눈치가 아니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이런 웃지 못할 사건들을 경험하며 자랐는데.
한번은 우리가 친구 집에 초대돼서 가는 길에 아이들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 마당에 사람들이 가득 들어와서 바비큐를 하는데 어떻게 된 영문이야?”
“에구, 놀랐겠다! 좀 전에 전도사님이 청년부를 데리고 공원에서 바비큐를 하려다가 물도 없고 화장실도 없어서 우리 뒷마당에서 하겠다고 하셨는데, 너희에게 말하는 걸 잊었네.”
부모의 대책 없는 손님 접대에 길들어진 아이는 “OK”하고 전화를 끊는다. 미안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결국은 모두 제 나름대로 우리가 했던 것들을 그대로 따라 한다는 것이다. 큰아들은 좁은 아파트에서 살 때부터 친구들이 수시로 매트리스를 깔고 자고 갔다. 음식은 잘 못 해도 어디서 주문하는 건 잘 아는 아들 며느리는 주문 음식으로 파티도 곧잘 한다. 들으니까 남의 아이 생일파티도 해준 것 같다. 간이침대도 사 놓았는데 무시로 묵고 가는 처남을 위한 것이다. 하는 짓이 딱 우리가 하던 그 모양새다.
음식도 잘하고 빵 굽는 걸 제대로 배우고 싶어 빵집에 취직까지 했던 딸아이는 바쁜 중에도 금요일마다 친구들을 불러 먹인다. 이름이 ‘금요일 영화 모임’이다. 딸의 대학원 졸업식에 참석하려고 보스턴에 올라갔더니 다음날 친구 스무 명을 불러 브런치를 하기로 했으니 도와 달라고 한다. 하도 작아서 조리대도 거의 없는 부엌 바닥에 앉아서 남편이 와플을 부쳤다. 그래도 상을 떡 벌어지게 차렸다. 본래 4차원인 딸내미는 친구들에게 면담 신청을 하라고 시켰다. 이름하여 ‘누가 나를 낳아주셨는지 와서 직접 만나라’는 이름의 브런치였기 때문이다. 그냥 재밌자고 붙인 이름이지만 정말로 친구 중 몇은 우리를 만나러 왔다고 했다.
우리 부모님과 시부모님의 진한 유전자는 우리 집 짠돌이 막내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어느 날 뜬금없이 우리에게 한 달에 한 번씩, 1년 동안만 고기를 보내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누가 먹을 건데? 했더니 친구들을 불러서 먹이겠단다. 짠돌이가 친구를 대접하다니…. 기특해서 고깃값을 보내줬다.
결혼한 둘째도 많이 변했다. 워싱턴 DC에 살아서 드물게 아들 집을 방문하는데 처음엔 아침도 안 차리더니 이제는 주위에 있는 이모네까지 불러 근사한 아침을 대접할 줄 안다. 다들 준비된 호스트(host)가 되어 가고 있는데 반가운 현상이다. 손님 접대는 처음에나 두렵지 한 번 하기 시작하면 별거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하면 할수록 쉬워지고, 하면 할수록 보람을 느끼는 게 손님 대접이다.
아이가 넷이에요? (아기 그림, 크기 소)
우리는 어딜 가나 아이가 넷 있는 집으로 불린다. 특히 사람이 많은 교회 같은 데서는 우리를 가리킬 때 “그 애들 넷 있는 집 있잖아요”라고 말한다. 사실 우리 어릴 때는 자녀가 넷이면 평균이었고 예닐곱 명이어도 특별히 여기지 않았다. 요즘은 다르다. 애들이 넷이라면 대개는 놀란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남편은 아이를 일곱쯤 낳고 싶다고 했다. 형제만 둘인 집에서 자라 애들 많은 집이 부러웠단다. 아무 생각 없는 나는 “오케이!” 하고 대답했다. 자매 많은 집에서 북적거리며 자란 나의 어린 시절이 행복했고, 정말 운이 좋았다고 믿는 나로서는 별로 놀라운 결정도 아니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1년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결국 산부인과에 가서야 내가 임신이 잘 안 되는 체질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아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남편이 “그럼 그냥 우리끼리 재미있게 살면 된다”고 했지만 어디 그런가? 남편은 지극히 가부장적인 시댁의 맏아들이었고, 나도 남들이 하는 건 다 해보고 싶은 성격이다. 1년 이상을 열심히 산부인과에 다니며 약물치료를 받은 뒤 큰애를 낳았다. 둘째 아이는 그래도 자연 임신으로 낳았는데 그 이후로 다시 임신이 되지 않았다. 아들 둘만 기르자는 남편을 딸을 꼭 낳고 싶다고 설득했다. 거의 6년 만에 딸을 낳았는데, 딸이 왠지 부담스럽다던 남편의 말은 내가 더는 아이를 낳지 못할까 봐 한 말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임신 중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날을 거의 30년이 된 지금도 기억한다. 얼마나 좋았던지 부러울 게 하나도 없었다. 지금도 딸을 낳던 1~2년을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때로 떠올린다. 딸아이에게 여동생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다시 낳은 아이가 막내다. 여동생이 아니고 남동생이었지만. 그렇게 우리는 아이 넷에 여섯 식구가 되었다.
큰아들과 막내의 터울이 꼭 10년이다. 자랄 때는 차이가 많은 것 같았는데 모두 성인이 된 뒤로는 거의 친구 같다. 가끔 남편과 내가 이 세상을 떠난 후를 상상한다. 책임감 강한 큰아들과 언제나 가족은 특별하고 중요하다고 믿는 딸아이가 우리 없이도 똘똘 뭉치는 접착제 역할을 할 것 같다. 거기에 형제처럼 어울리며 자란 사촌들, 사촌같이 친한 친구들이 주변에 있으니 외롭지 않을 것 같다. 남편과 내가 그렇게 바라던 “울타리” 기초 공사는 해놓은 셈이다.
결혼한 아이들은 매년 번갈아 사돈댁과 우리 집에서 휴가를 보낸다. 이 전통은 사실 둘째 며느리 제이미(Jamie) 때문에 생겼다. 제이미의 결혼한 언니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우리도 자연히 사돈댁에 맞추게 된 것이다. 결혼한 아이들은 크리스마스를 우리 집에서 지내면 추수감사절은 사돈댁에서 지낸다. 다음 해에는 반대가 된다. 그러다 보니 큰며느리도 같은 해에 친정 나들이를 한다. 우습게 된 건 우리 큰며느리보다 3년 늦게 결혼한 그집 언니도 우리 집과 보조를 맞춘다는 것이다. 나머지 두 아이가 결혼해도 이 전통을 따르게 되리라.
2년 전 크리스마스는 아이들이 집에 오는 해였는데 마침 미국 중부로 이사 간 아래 동생이 뉴욕의 두 아들과 예비며느리와 휴가를 보내고 싶다며 바닷가 집에 묵을 수 있는지 물어왔다. 우리 식구 아홉에 동생네 식구 여섯 그리고 때마침 서울서 놀러 온 큰언니까지 어른 열여섯에 아이 두 명이 바닷가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다. 동생이 크리스마스 단체복으로 프란넬 잠옷을 주문했다. 우리는 남녀의 색깔만 다를 뿐, 같은 잠옷을 입고 3박 4일을 지냈다.
사전에 보면 식구(食口)의 뜻은 “같은 집에서 살며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이다. 가족도 뿔뿔이 흩어져 만나지 않으면 남이나 다름없이 되듯이, 남도 같이 먹으며 지내면 식구처럼 가까워진다. 올해도 크리스마스에 아이들이 오는 해. 이번에도 재작년과 꼭 같은 멤버에 막냇동생 부부도 오게 됐으니 더 풍성한 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다. 요즘은 아이 넷만 해도 식구가 많다고들 하는데 우리 집은 사전적 의미의 식구가 워낙 많아서 아이를 열둘쯤 둔 가정과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김 씨네 추수감사절 (칠면조 그림, 크기 소)
큰아이가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남편이 문득 이런 말을 했다. 우리도 이제부터 추수감사절을 지내는 게 어떻겠냐고. 아이들을 위해 전통을 만들어나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추수감사절을 지내본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말로만 듣던 절기지만 남편은 몇 번 추수감사절 식사에 초대받은 경험이 있어 나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추수감사절을 지내보기로 했다. 우선 부모님과 주변에 사는 친척들을 초대했는데, 시외가의 거의 모든 분이 이민을 오셔서 결국 우리 집 추수감사절은 보통 삼사십 명 정도가 모여 먹게 되었다. 준비를 해보니 추수감사절 상차림은 생각보다 쉬웠다. 메뉴의 절반은 그저 오븐에서 구워낸다고 해도 과장된 말이 아니다. 그래서 훗날 집을 지을 때는 추수감사절을 위해 부엌에 오븐을 두 개 설치했다.
추수감사절 식사는 저녁 대신 점심에 했다. 저녁에는 다른 모임들도 많고, 집이 먼 친척들은 갈 길이 멀어 점심이 편했다. 지금도 결혼한 조카들은 저녁은 처가에 가더라도 점심에는 우리 집 추수감사절을 함께 지내려고 나타난다.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땡스기빙(Thanksgiving) 대신 킴스기빙(Kimsgiving)이라고 부른다. 김 씨네 추수감사절이란 뜻인데, 수년 전 우리 집에서 추수감사절을 지낸 딸아이 친구가 붙여준 이름이다.
내가 추수감사절 상을 차린 지 벌써 35년이 되었다. 마침 큰아이가 우리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이사 왔기에 이제부터 ‘킴스기빙’을 큰아들네에게 물려주기로 했다. 걔들도 이미 두 아이의 부모이니 추수감사절 전통을 이어가야 할 것 아닌가. 우리와 달리 추수감사절을 지내며 자랐으니 처음 몇 년만 음식준비를 도와주면 잘할 것이다.
“올해는 우리 집에서 추수감사절 안 해도 되니 좋지?”
하고 남편에게 물으니 뜻밖의 대답을 한다.
“아니, 좀 허전해. 그래도 사람들이 북적북적하는 게 좋잖아.”
세상에, 못 말린다. 우리 집은 추수감사절이 아니더라도 허구한 날 손님들로 북적이는데 허전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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