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우리는 아직 70년대를 삽니다

그냥 생긴 대로 삽시다 

출근한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학 1년 선배가 집에 올 건데 일단 맞아달라는 얘기였다. 그 선배는 결혼 전에 한두 번 본 적이 있지만 로스앤젤레스로 옮겨간 이후론 본 적이 없었다. 초인종이 울려 아이를 한 손에 안고 문을 여니 선배와 그의 어머니였는데 커다란 이민가방과 작은 가방들을 들고 서 계시는 게 아닌가? 영문도 모르고 일단 어서 오시라며 맞이했다. 알고 보니 어머니는 사정이 있어서 갑자기 집을 떠나실 수밖에 없으셨다고 한다. 그날부터 선배와 어머니는 우리 집 응접실 한쪽에 이부자리를 펴고 지내게 되었다. 집은 컸지만 한 층은 세를 주었고 나머지는 너무 낡아 고쳐야만 해서 손님방이 따로 없었다.

나보다 황당해하신 건 시어른들이었다. 남의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니 당신들도 안 시키는 시집살이를 하는 것 같아 조금 불편하셨던 것 같다. 그런데 나와 남편은 다른 방법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덥석 오시라고 한 남편이나, 남편이 그러자고 했으니 그 방법밖에 없는 줄 알았던 나나, 결혼만 했지 아무것도 몰랐던 스물여섯 어린 나이였기에 가능했던 건지도 모른다. 선배의 어머니는 몇 달 계시면서 큰애도 봐주시고 가끔 음식도 해주셨다. 떠나실 때는 좀 우셨던 것도 같다. 거의 35년 전 일이다.

사실 우리 부모님 세대에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한국전쟁 중에는 그냥 아무 집이나 머리 들이밀고 같이 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부모님은 성북동 어느 집에 전세로 살고 계셨는데 7개월 만에 집주인이 사정이 생겼다며 온 식구를 데리고 나타나 할 수 없이 같이 살았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사과 반쪽도 나누어 먹던 가난한 시절, 사람이 사람을 믿던 시절에는 그런 일이 흔했는데 모든 것이 풍요해진 요즘은 오히려 서로 경계하며 야박하게 사는 것 같다. 

태생이 애늙은이 같은 우리 딸은 가끔 이런 얘기를 한다. 아날로그 세상에서 자라난 엄마가 부럽다고. 컴퓨터를 전공하고 AI 분야 사업을 창업한 아이가 할 말은 아닌데 말이다. 이 아이는 초시대 젊은이답지 않게 책장을 넘기는 맛에 전자책 대신 종이책을 읽는다. 친할머니, 외할머니가 지니셨던 유행에 뒤처진 액세서리를 하고, 할머니들이 입으셨던 옷 입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우리 딸 말마따나 나는 가난하고 열악했으나 정과 낭만이 넘쳤던 아날로그 시대에 자라나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흙장난, 소꿉장난에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유년기,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던져놓고 어두워질 때까지 친구들과 골목에서 뛰어놀던 행복한 추억이 있다. 깡통을 들고 집집이 밥 동냥 다니는 거지도 보았고, 구멍 난 신발을 신고 점심을 굶는 가난한 친구가 적지 않았던 세상도 살아보았다. 오랫동안 푸세식 화장실도 사용해봤고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 버스도 타고 다녔다. 

대신 우리는 전쟁도 겪지 않았고, 사람이 달나라에 가는 것을 목격했으며, 언젠가는 우주여행도 할 수 있는 풍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발전된 시대를 사는 만큼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안다. 수도꼭지만 틀면 나오는 더운물이 고맙고 연탄 때지 않는 난방시설이 고맙고 수세식 화장실이 고맙다. 풍요가 가져온 편리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건 궁핍했던 시절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누리는 모든 게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그런데 현실을 생각하면 마냥 아날로그 시대의 정서로만 살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든다. 부동산 투자가 직업이라 공사를 해야 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사람을 잘 믿다 보니 여러 차례 작은 사기를 당하게 되었다. 돈을 받고 중간에 잠적하는 일도 있고 계약을 터무니없이 안 지키는 경우도 있다. 한두 번이 아니니까 이럴 때마다, “아! 우린 왜 이렇게 사람을 믿었을까? 그렇게 당하고도 배우는 게 없을까?” 하고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사실은 돈보다 어떤 때는 사람에 대한 실망과 나에 대한 회의가 더 견디기 힘들다. 밤새 속상하고, 왜 믿고 돈을 줬을까 하며 불면의 밤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다 언젠가 아주 크게 사기당한 적이 있다. 집에 자주 드나들며 우리 아이들에게 맛있는 음식도 해주고, 아이들도 아저씨, 아저씨 하며 따르던 그리스 친구가 7년 동안 우리에게 소개해준 사람들에게 뒷돈을 받아 챙겼다는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금전적 손해보다도 인간에 대한 실망이 몇 배나 컸다. 분하고 억울해하는 나에게 남편이 이런 말을 했다.

“어차피 이 세상의 모든 나쁜 사람들도 알고 보면 하나님의 자녀잖아. 누군가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면 굳이 우리가 못 할 것도 없지.”

뭐 이런 궤변이 있나? 그런데 곰곰 생각하니 그 말이 위안이 되었다. 어차피 내게 주신 모든 재물이 내 것이 아닌 바에야 손해 보는 분은 하나님이지 내가 아니다. 사실 남에게 돈을 꾸는 사람과 꾸어주는 사람 둘 중에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 사기 치는 사람과 사기당하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가 물으면 금세 답이 나온다. 돈을 꾸어주고, 사기를 당하는 편이 백 배 낫다. 그래서 우리는 오래전에 결정했다. 

“Stick to your guns!”

“그냥 우리 생긴 대로 삽시다!”

그동안 우리식대로 살다가 잃은 것도 있지만, 그 대신 40년 가까이 함께 일하는 사업 파트너들을 얻었다. 손익계산을 해보면 이익이 훨씬 크다. 세상에는 믿을 만한 사람이 믿을 수 없는 사람보다 많다.

아메리칸 드림

호석 씨와의 인연은 이렇다. 1991년에 뉴저지로 이사한 다음해부터 집 근처에 있는 뉴저지연합장로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20년쯤 후인 2010년경에 우리는 청년부를 섬기게 되었는데 한 달에 한 번씩 학생들에게 저녁 식사와 친교 자리를 제공하는 일이었다. 열 명에서 많게는 스무 명 가까이 유학생들이 모였는데, 그날 몇 명이 모이는지 미리 알기 어려웠다. 자연히 음식 남기는 걸 싫어하는 내가 양 조절을 못 해서 음식이 거의 동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송 집사님 댁에서 먹을 때는 절대 늦으면 안 된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전도사님의 간곡한 부탁을 받게 되었다. 대학부 회장 호석 씨가 집세를 감당할 수 없어서 새로이 있을 곳을 찾고 있는데 집에 남는 방이 있으면 한 달 정도만 묵게 해줄 수 있냐는 것이다. 당시 딸아이가 고등학생이어서 시댁에서 조금 걱정하시는 눈치였지만, 갈데없는 유학생이 딱해서 일단 그렇게 하기로 했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방만 제공하면 되나 싶었는데 막상 같이 살게 되니 본의 아니게 하숙집 아줌마가 되었다. 손님이 있으니까 메뉴도 평소같이 부실하게 할 수 없었는데 그 덕에 남편과 아이들이 아주 조금 잘 먹을 수 있었다. 다행히 호석 씨는 한식을 잘 안 먹는 우리 식단에 잘 적응했다. 우리는 파스타나 타코 같은 애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자주 먹었는데 먹성 좋은 호석 씨는 아무거나 맛있게 먹어 주었다. 그러자 어느 날부터는 호석 씨를 식구로 착각하게 되었다. 

한 달 예정이던 게 넉 달이 넘어가고, 정이 흠뻑 든 뒤에 호석 씨는 일단 서울로 돌아갔다. 미국에서 물리치료사 되는 게 꿈이었던 이 친구는 서울에서 몇 년 더 공부한 후 미국에서 자격시험을 치르러 다시 왔다. 전에 살던 그 방이 공부가 잘 된다며 열흘 동안 열심히 준비한 덕에 무사히 합격했다. 그리고 좋은 일자리를 얻어 플러싱(Flushing)에 있는 통증 치료원에 취직했다.

신앙심 깊은 호석 씨는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했는지 착하고 예쁜 미경 씨를 만나 세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남편은 호석 씨를 보고 늘 “저런 게 바로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한다. 거의 무일푼으로 미국에 유학 와서 열심히 일한 덕에 이제는 롱아일랜드(Long Island)의 좋은 동네에 예쁜 집을 사서 주말이면 잔디 깎으며 식구들과 알콩달콩 살고 있으니 말이다.

호석 씨가 직장을 구하고 미경 씨를 인사시키려고 집에 데리고 왔을 때 우리는 마치 아들이 여자친구를 데리고 온 것처럼 기뻤다. 게다가 왜 그렇게 예쁘고 착한지…. 그때 우리는 두 사람에게 자진해서 미국 보호자가 되어주겠노라고 했다. 양가 부모님이 서울에 계셔서 참석하지 못한 결혼식 피로연에는 정말 우리가 가족석에 앉았다. 한없이 고맙고 감동적이었던 건 호석 씨가 언젠가 준 카드에 적힌 이 말이었다.

“이제는 저희도 집사님같이 다른 사람들을 거두고 먹이고 싶습니다.”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는 평생 당신이 별로 인복이 없는 것 같다고 푸념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 끝에 그나마 당신 자식들은 인복이 있는 것 같다 하시며 나름대로 위로를 받으셨는데 그래서인가, 나는 정말 인복이 많은 것 같다. 내가 남에게 베푼 아주 작은 일에 과분하게 고마워하니까 오히려 미안할 정도다.

호석 씨는 어버이날이나 성탄절에 정성껏 준비한 선물을 보낸다. 그런데 그것보다 좋은 것은 아이들까지 데리고 놀러 오는, 마치 친조카 같은 사이가 되었다는 점이다. 

난감한 우리 집 예약상황

“거긴 안 좋은 동네야. 그냥 우리 집으로 보내!” 

남편이 친구와 전화하는 걸 들으니 또 손님을 받고 있나 보다. 우리 집이 호텔도 아닌데…. 지난번에도 동창 아들딸들이 예약해놓은 에어 비앤비를 취소시키며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었는데 또? 이번엔 누구인가 들어보니 초등학교 동창 준이 씨네 둘째 아들이다. 법학을 전공하는데 여름방학 동안 브루클린 지방법원에서 인턴을 한단다. 법원이 우리 집에서 그리 가까운 것도 아닌데 굳이 걸어가는 거리라며 보내라는 것이다. 9주라니 좀 긴 것 같긴 한데 벌써 일방적으로 말을 해버렸으니 어쩌랴. 집에 손님방이 하나밖에 없는데 뉴욕을 지나는 손님들의 숙소가 되다시피 해서 서재에서 재우기로 했다. 거기도 한쪽에 침대가 있고 욕실이 있어서 급하면 손님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손님 방에도 예약이 생겼다. 멀리 사는 동생이나 친구들은 우리 집에 손님이 많다는 걸 알고 뉴욕에 오기 전 예약을 한다. 그런데 남편이 서울 사는 사촌 동생과 전화하는 걸 옆에서 들으니 그 집 둘째가 뉴욕 여행을 온다는 것 같다. 내가 옆에서 재울 방이 없다는 신호를 보냈음에도 남편은 또 손님을 받아버렸다. 에구, 진짜 곤란한데, 이럴 때 호텔이면 한 사람은 환불해 주면 되겠건만…. 아무튼 난감하여 한동네 사는 큰아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총각 하나 한 일주일만 너희 집에서 맡아줄 수 있냐고. 

우리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이런 상황을 수없이 봐 와서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그때는 좀 심했다 싶었는지 제 아빠에게 심각한 문자를 보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냐고? 결국 날짜를 좀 조정해 겹치지 않게 두 팀씩 자고 갔다.

그해 여름 9주 동안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낸 기용이와는 또 가족이 되었다. 이민 2세에 가까운데도 군대를 다녀와서 그런가, 예의 바르고 부지런했다. 우리가 가끔 논쟁을 벌이면 중립을 지키는 센스도 있었다. 지금은 어엿한 변호사가 되었는데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어서 가끔 만나곤 한다. 명절이면 전화를 걸어 인사하는, 정말 칭찬밖에 할 게 없는 보기 드문 청년이다. 기용 씨 어머니가 아들을 참 잘 키우셨다.

빈 둥지를 채워준 예쁜 조카

막냇동생의 큰딸 이름은 캐리스다. 하나님의 은혜 그레이스(Grace)를 그리스말로 캐리스(Karis)라고 한다. 엄마가 좋은 이름을 지어 주어서 그런가, 우리 캐리스는 얼굴만 이쁜 게 아니라 마음도 참 곱다.

몇 년 전 여름에 대학졸업반인 캐리스가 우리 집 근처 학교에서 8주간 교생실습을 하게 되었다. 자취하는 것보다 절약도 되고, 귀여운 조카를 여름내 데리고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기꺼이 맡기로 했다. 장래 희망이 학교 선생님인 아이라 좋은 기회가 될 듯싶었다.

우리 아이들 넷이 다 집을 떠나고 빈 둥지가 된 우리 부부는 귀여운 딸내미를 하나 입양한 기분이었다. 남편은 아침마다 걸어가도 되는 지하철역까지 차로 데려다주면서 옛날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던 맛을 다시 느끼는 것 같았다. 그때 영화 <기생충>이 한창 인기였는데, 캐리스는 자기가 우리 집에 기생충처럼 얹혀산다고 기생충의 영어단어 ‘Parasite(패러사이트)’에 자기 이름 첫째 글자 K를 붙여 ‘Karasite(캐러사이트)’라고 자칭했다. 우리는 지금도 캐리스를 농담 삼아 “my Karasite”라고 부른다. 

두 달이 화기애애하게 지나가고 있던 어느 이른 아침, 우리는 전화 소리에 잠이 깼다. 캐리스의 오빠였다. 캐리스가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던 중 찬장 위에 장식으로 붙어있던 커다란 나무조각이 떨어지면서 인중을 베었는데 놀란 캐리스가 우리를 깨울 생각은 못 하고 제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놀라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니 피가 철철 나는 캐리스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우리한테 미안해하며 계속 괜찮다고만 했다. 얼른 근처 응급실로 데리고 갔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한나절 앉혀만 놓고 차례를 기다리라는 거였다. 급한 마음에 방사선과 의사인 며느리에게 전화했더니 좋은 성형외과로 데리고 가는 게 좋겠다고 한다. 우리는 의사 친구의 인맥을 동원해서 바로 성형외과에 데려가 치료받게 했다.

나는 동생 부부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좋은 마음으로 맡았는데 이런 난리를 치렀으니 말이다. 동생네는 되레 우리에게 미안해했다. 천만다행으로 흉터가 거의 남지 않은 것 같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

그렇게 산전수전을 겪으며 두 달 동안 같이 먹고 자고 하는 동안 캐리스는 조카가 아니라 딸처럼 가까워졌다. 지난번에 워싱턴 DC에 사는 막내아들을 보러 갔을 때 그 동네 사는 캐리스가 남편 옆에 와서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전하는 남편 얼굴이 참 행복해 보였다.

허리케인 샌디 

2012년, 미 동부지역을 강타했던 허리케인 샌디는 뉴저지도 예외 없이 휩쓸고 지나갔다. 그 여파로 전기가 나가 우리는 거의 2주간을 고생했다. 처음엔 바로 옆 동네만 정전되어서 거기 사시던 목사님과 사모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 집에 피난 오셨다. 그러나 며칠 후 우리 동네마저 전원이 끊겨 기약 없이 전기를 기다리며 피난민처럼 지내게 되었다. 다행히 가스는 들어와서 음식을 할 수 있었고, 응접실에 가스 벽난로가 있어서 그 앞에 모여 몸을 녹였다. 그때가 10월 말이었는데 왜 그해 따라 그리 추웠는지 모른다. 11월 10일경까지 덜덜 떨며 지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와중에 남편 친구 동진 씨한테서 전화가 왔다. 뉴저지 기숙학교에 다니고 있는 딸 원경이가 뉴욕 시외버스 터미널에 있는데 좀 데려와 줄 수 있느냐는 거였다. 시내에도 대부분 전원이 끊겼기 때문에 뉴욕 주민들은 급한 경우가 아니면 외출하지 말라는 권고가 있었던 때였다. 우리는 서둘러 원경이를 데리러 갔다. 뉴욕시는 전쟁이 난 것처럼 스산하고 썰렁했다. 길에는 차들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재빨리 원경이를 찾아서 집으로 데리고 왔다.

아주 어릴 때 한 번 봤는데 어느새 11학년이 된 원경이는 내성적인 성격인 듯, 기억에 없는 아빠 친구 아저씨를 따라오면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딸 아이 쓰던 방이 비어 있어서 거기에 재웠다. 다음날 학교에 데려다주려고 기숙사에 전화해보니 학교도 전기가 안 들어와 당분간 무기한으로 닫는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그로부터 근 일주일을 원경이는 우리와 같이 피난살이 하는 신세가 되었다. 집안 전체가 너무 추워서 오리털 이불을 내주고 식사도 침대로 가져다주었다. 며칠이 지나자 말이 없던 원경이가 입을 열기 시작해 서로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대학에 가고 싶은지, 흥미 있는 분야는 뭔지, 대학입시원서 수필은 어떤 주제로 썼는지…. 워낙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같이 고생하면서 동지애 같은 게 생겨 마음을 연 것 같다. 

같은 동네에서도 희한하게 전원이 나가지 않은 몇몇 골목들이 있었다. 평소 말하기 좋아하고 남 먹이기를 나만큼이나 좋아하는 친구 수잔이 전기가 나가서 고생하는 친구들을 위해 하루 종일 자기 집에서 임시 대피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도 인터넷이 너무 필요해서 신세를 좀 지기로 했다.  

한국 어머니와 중국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수잔은 핏줄이 당겨서인지 나와 친하다. 수잔의 아들 노아는 우리 막내와 한동네에서 자란 친구다. 어느 날 수잔은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언젠가 공원에서 만난 여자가 수잔 아들 노아를 집에 데려가 자기 아이와 함께 봐주었는데 그게 바로 나였다는 것이다. 나는 정말 기억이 안 났지만 있을 법한 일이라 믿기로 했다. 

아무튼, 수잔네 집에 원경이까지 데리고 온 식구가 피난을 가보니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무리 지어 앉아 있는 게 노숙자 합숙소 같았다. 반면에 신이 난 수잔은 부엌에서 커다란 솥 한가득 수프를 끓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수프 키친(Soup Kitchen 주로 노숙자들을 먹이는 시설을 그렇게 부른다)’이 따로 없었다.

전원은 2주가 다 되어 복구되었다. 얼었던 집에 온기가 도는 데만도 하루가 더 걸린 것 같다. 어이없는 경험이었지만 어려운 가운데 싹트는 인간미를 맛보았다. 사람이 극한 상황이 되면 힘을 합쳐 살 방법을 강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아무리 나쁜 상황이라도 극복하고 나면 반드시 얻는 게 있다.

인생 끝에 남는 건 추억뿐 (그림 있음)

작년에 독일 뮌헨에 사는 조카가 우리 집에서 5주간을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작곡가인 조카는 해마다 미국에서 여름 음악제를 열고 있어서 좀 일찍 온 것이다. 유럽에서는 백신 접종이 늦어서, 음악제가 시작되는 7월 전에 미국에서 2차 접종을 완료하고 2주간의 자가격리를 하려면 최소 5주의 시간이 필요했다.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태어나 10개월도 안 된 노엘(Noel)이도 있으니 호텔에 간다는 건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손님방과 아이가 놀 공간이 있는 우리 집이 나을 것 같아 오라고 했다. 우리는 6월 초에 2주간 터키를 여행할 예정이어서 3주 정도 같이 있겠거니 하며 흔쾌히 맞았다.

그러나 코로나로 우리의 여행은 취소되었다. 에베소와 카파도키아에 갈 생각하며 설렜는데 허사였다. 결국 우리는 조카네 세 식구와 5주를 보내게 되었다.

첫 주는 바닷가집에서 지냈다. 마침 해마다 여름에 모이는 ‘가족 행사’에 근처에 사는 다른 조카들과 워싱턴 DC에 사는 막냇동생 부부까지 들르게 되어 거의 스무 명 가까이가 그야말로 지지고 볶으면서 즐겁게 지냈다. 바이올린 연주자인 조카며느리는 짬짬이 연습을 하곤 했는데 한 곡 청했더니 흔쾌히 승낙했다. 제대로 연주를 듣고 싶어서 피아노 연주자인 막냇동생을 졸랐다. 반주를 해준다면 훌륭한 연주가 될 것 같았다. 동생의 연주를 작년에 콘서트에서 들었는데 정말 혼자 듣기 아까웠다.

피아노가 있는 지하실은 울림이 생각보다 훌륭했다. 모차르트 바이올린 콘체르토를 연주했는데 둘이 한 번도 맞추어 보지 않은 호흡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하모니를 이뤘다. 무엇보다도 가족끼리 작은 음악회를 할 수 있다는 게 특별하고 좋았다. 또 우리 식구만 둘러앉아도 꽤 청중이 많아서 식구 많다는 게 여러모로 든든하고 좋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겠다던 조카며느리도 우리 집에서 북적대는 사촌들을 보고는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생긴 것 같다.

웃지 않을 수 없었던 건 음악을 감상하는 아기들이었다. 노엘이는 피아노 옆에서 악보를 넘기는 아빠에게 안겨서, 내 큰손자 호린(Ethan)이는 짜파게티를 먹으면서, 작은손자 호원((Caleb)이도 아빠 품에 안겨서 연주가 다 끝나도록 미동도 하지 않고 듣고 있었다. 아름다운 선율에 압도되어 숨죽이며 연주를 듣는 어른들의 모습에 동화된 걸까? 다음엔 미리 준비해서 성악 전공 셋째 언니까지 함께하는 음악회를 제대로 계획해봐야겠다. 그날 연주는 조카네를 5주 동안 재워주는 값을 충분히 퉁칠 수 있겠다 싶을 만큼 좋았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조카네와 우리는 좀 불편한 가운데서도 서로 더 알게 되었다. 멀리 독일 뮌헨에 살아서 만나기 힘든 조카며느리와 미국 동부에 사는 사촌들이 만나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도 큰 보람이었다.

조카네가 떠날 때쯤에는 혹시나 노엘이 보낸다고 울게 되면 어쩌나 싶게 정이 들었다. 아기들은 꼭 똥 기저귀를 몇 번 갈아줘 봐야 정이 든다. 같이 한 상에서 먹는 사람들을 식구라고 하는데 정말 맞는 말이다. 남도 같이 먹고 자다 보면 식구가 되는데 조카네야 더 말할 게 있을까.  

이만큼 살고 뒤돌아보니 의외로 남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별로 이룬 게 없기에 남길 것도 없는지 모른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친지 친구들과 함께 보낸 아름다운 시간이 켜켜이 추억으로 쌓여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잠깐 머물다 가는 나그네인 이상 좋은 사람들과 만든 그 값진 경험으로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힐튼 헤드 섬 (바다 그림, 크기 대)

1991년, 집으로 날아온 광고 한 장에 낚였다. 메리어트(Marriott) 호텔에서 파는, 1년에 1주일 사용할 수 있는 리조트 선전이었다. 리조트를 체험해보라며 2박 3일 숙박권을 제공하는데 공짜 좋아하는 내가 덥석 미끼를 무는 바람에 결국 그것을 사고 말았다. 

메리어트 리조트는 사우스캐롤라이나(South Carolina)주에 있는 힐튼 헤드 섬(Hilton Head Island)에 있다. 이곳은 옛날부터 미국의 부자들이 휴양가는 곳으로, 플로리다(Florida)주보다는 북쪽이지만 야자수를 볼 수 있고 열대기후에 가깝다. 밀가루처럼 곱고 하얀 모래사장도 일품이다. 그 해변에 늘어서 있던 낡은 호텔들을 밀어내고 메리어트 같은 큰 호텔들이 너도나도 리조트를 지은 것이다.

우리는 20년을 한결같이 여름에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을 찾았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한 번도 우리 식구끼리 간 적이 없다. 처음 몇 해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갔고, 몇 년 뒤부터는 동생과 조카 둘, 시동생과 조카 둘을 번갈아 데리고 갔다. 그때만 해도 아주 아기가 아니면 카시트에 앉히지 않아도 되도록 법이 느슨했다. 우리는 8인승 승합차의 맨 뒷자리를 빼고 아이들을 조르르 눕혀서 태우고 갔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할 만큼 위험한 방법이었는데 그때는 무지해서 그랬는지 별로 위험하다는 생각을 못 했다. 

아이들이 덩치가 커지면서 의견을 묻고 선택권을 주었지만 아이들은 늘 방 두 개짜리 공간에서 불편하게 끼어 자야 해도 사촌들을 데리고 가는 편을 택했다. 그렇게 지내는 게 얼마나 좋았는지 딸아이는 “힐튼 헤드에서 일주일을 보내지 않고는 우리 식구의 여름은 결코 완성될 수 없다”고 얘기하곤 했다.

우리의 휴가는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주로 새벽 2~3시에 자는 아이들을 깨워서 베개와 이불을 대충 싸 들고 차 안에 차곡차곡 태우고 떠난다. 새벽에 떠나야 아이들이 차를 타는 열세시간 중 반쯤 잘 수 있고 덜 지루해서다. 9시쯤 도착하는 동네에서 자는 아이들을 깨워서 아침을 사 먹이고 오후 2시쯤 또 한 번 점심을 먹이면 저녁 6~7시쯤 힐튼 헤드에 도착한다. 내 운전을 못 믿어 남편은 오랜 시간 도맡아 운전하느라 녹초가 되었지만 도착해서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 금방 다 잊어버렸다. 아이들이 운전면허를 받고 나서는 조금씩 교대를 해주어서 남편도 가끔 뒤에서 자면서 갈 수 있었다. 아무튼, 20년 동안 우리와 같이 여름휴가를 보낸 가족 친지는 셀 수 없이 많다.

2014년에 바닷가 집을 갖게 되면서 힐튼 헤드에 자기의 어린 시절이 담겨 있다고 굳게 믿던 딸아이에게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했다. 딸아이도 다 커서인지 너그럽게 양해해 주었다. 언젠가 한 번쯤은 두 손자와 아니, 그때쯤엔 더 많이 생길지도 모를 손주들과 다시 가보고 싶다. 우리의 오랜 추억과 행복했던 순간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올 그곳에 가서 여기가 너희 엄마 아빠가 딱 너희들만 할 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며 재밌게 지낸 역사가 있는 곳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Comments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