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향인가, 내향인가
어쩌다 보니 내가 많은 사람과 어울리며 살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남보다 사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다. 나보다는 조금 더 낯을 가리는 남편 때문에 상대적으로 외향적으로 보일 수는 있다.
어렸을 때 나는 굉장히 내성적이고 겁이 많았다. 오죽하면 내 성격을 걱정하신 어머니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등을 떠밀어 걸스카우트에 보내셨을까. 하물며 아버지는 내가 너무 조용해서 있는지도 몰랐다고 하셨다는 말을 듣고는 살짝 슬퍼할 뻔했다. 내가 존재감 없는 아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우리 집에 같이 사는 아저씨들이 자꾸 나를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놀려서 정말 그런 건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아셨는지 하루는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잘 생각해 봐. 엄마가 네 위로 딸이 셋 있는데 아이를 주워다 길렀다면 또 딸을 데려왔겠니?”
듣고 보니 맞는 말이어서 결국 우리 부모님이 네 번째로 나를 낳으신 걸로 해결 봤다.
지금의 나를 보면 의아해할 만큼 목소리 큰 아줌마가 된 지 오래지만,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얌전한 편에 속했다. 중간에 낀 아이들이 흔히 그렇듯이 나도 약간 착한아이 증후군이 있었던 것 같다. 위로 세 언니와 아래로 여동생 둘 사이에 끼어 있는 나는 말 잘 듣는 아이가 되지 않으면 부모님의 관심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막연한 걱정을 하며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도 우리 여섯 자매 가운데 자랄 수 있었던 건 누가 뭐래도 행운이다. 다들 어른이 된 지금은 천금을 준대도 바꿀 수 없는, 서로의 가장 든든한 보호막이고 삶을 나누는 반려자들이다.
아들만 둘 있는 집의 맏아들로 자란 남편은 나와는 다르게 자존감이 높은 편이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키도 학교에서 제일 크다시피 해서 동네에서도 골목대장이었다고 자랑한다. 중학교 1학년 때 미국에 온 뒤로 문화충격을 받아서 성장이 멈췄다는 근거 없는 소리를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이 외향적인 성격은 결코 아니다. 자기가 편한 사람들 앞에서는 말이 많아지지만,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아주 힘들어하고 심지어 말이 없는 편에 속한다. 이런 우리가 집을 자주 개방하고 사람들을 끊임없이 먹이는 것은 어릴 때부터 받은 가정교육이 가장 큰 이유다.
어머니는 우리가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면 남을 위해 베푼 물질들만 온전히 내 것으로 남는다고 귀에 딱지가 박히게 말씀하셨다. 남편도 자랄 때 세뇌될 만큼 듣던 말이 “밥값은 네가 네라”는 것이었다. 부자와는 거리가 멀었던 시아버님이 왜 그런 생각을 가지신 건지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다.
한국 사람이 많지 않던 70년대에 이민 온 사람들은 길 가다 한국 사람을 만나면 서로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집에 초대하기도 했다고 한다. 내가 유학 중이던 80년대 파리도 비슷했다. 지하철 같은 데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반가워서 말을 걸어도 이상할 게 없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파리나 이곳 뉴욕에 한국 사람이 아주 많지만 우리는 서로 아는 척하지 않는다.
몇 해 전 서울에서 지하철을 탔을 때다. 이제는 명실공히 외국인이라 옆에 앉은 젊은 여성에게 지리를 물어보게 되었다. 그는 내가 갈아타고 가야 한다면서 마침 자기도 거기서 갈아타니 데려가 주겠다고 했다. 하도 고마워서 가는 내내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가 급기야 이메일주소를 주고 말았다. 혹시 뉴욕에 오게 되면 연락하시라고. 정말 기꺼이 재워줄 생각이었는데 아직 연락이 없다. 이런 내가 외향적인 건가? 내 생각엔 그냥 사람을 덜 두려워하고 잘 믿는 것일 뿐, 외향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큰언니가 지하철에서 일어난 일을 듣더니 이제 서울에서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보이는 호의를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불신의 벽이 높아진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계속 사람을 의심하면서 폐쇄적으로 살기보다는 무조건 믿고 사는 게 혹시 뒤통수를 맞더라도 낫지 않을까?
살아보니 생각보다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 무조건 믿어주면 때로는 내 등을 치려던 사람이 나도 모르게 친구의 자리에 서 있을 수도 있다.
밥값 놓고 싸우지 맙시다
남편과 내가 가끔 하는 상상이 있다. 내 사촌 석향 언니와 남편의 사촌 효순 언니가 같이 식사하면 계산은 누가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나지 않는다. 두 분의 성향이 막상막하기 때문이다.
남편도 나처럼 식구 많은 집에서 자랐다. 내가 처음 서울의 시외삼촌 댁에 인사드리러 간 날은 외숙모 생신이었는데 집안 가득 손님이 계셨다. 작은 마당에 늘어선 장독대 앞에서 식구들이 세 줄 네 줄로 서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남편의 외사촌 누님 효순 언니는 무슨 영문인지 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아주 예뻐하셨다. 그래서 나도 시누이를 언니라고 부르며 따랐다. 언니는 40년이 다 된 지금도 우리 올케, 우리 올케 하시며 나를 챙기신다. 결혼 전 파리로 말린 오징어를 부쳐주신 것을 시작으로, 요즘도 철철이 떨어뜨리지 않고 귀한 음식을 다른 선물들과 함께 보내주신다. 이제 그만하시라고 해도 막무가내다. 서울에 갈 때마다 밥을 사주시는데 커피 한 잔이라도 내가 사면 너무 속상해서 화를 내실 기세다. 아이들에게는 쳐다보는 것마다 다 사주셔서 우리 아이들이 안 쳐다보려고 조심했다는 말까지 한다. 아이들은 효순 언니를 “뭐든지 다 사주시는 고모”라고 부른다.
내 외사촌 석향 언니도 만만치 않다. 한번은 언니와 식당에 갔는데 그간 하도 얻어먹기만 해서 이번에는 반드시 내가 계산하리라 다짐했다. 먹는 내내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계산대를 힐끔거리면서 언니보다 먼저 밥값을 내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작전 실패였다. 결국 언니한테 덜미를 잡혀 실랑이 끝에 또 언니가 내버렸다.
언니가 미국에 놀러 왔을 때 이번에는 미국 사정에 나보다 둔할 수밖에 없는 언니를 따돌릴 수 있었다. 언니가 고른 핸드백 값을 재빠르게 계산했는데 점원이 우리가 싸우는 줄 알았을 것이다. 부산 사투리로 마구 화를 내는 언니의 억양이 매우 거셌으니 말이다.
나보다 두 살 위인 언니는 부산에 사시던 큰외삼촌의 딸이다. 우리 가족은 어릴 때 해운대로 가족 피서를 가곤 했는데 늘 외숙모가 맛있는 주먹밥에 반찬을 바리바리 싸 들고 숙소에 오셨다. 누구에게나 후하고 베풀기 좋아하시던 외삼촌과 숙모를 꼭 닮아서 석향 언니도 베푸는 데는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럽다. 요즘은 서울에서 집밥을 대접받는 일이 드문데 효순 언니와 석향 언니는 집에서 음식을 해 먹이는, 요즘 보기 드문 화석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도 닮았다. 단점은 자기들은 한없이 베풀면서 남의 호의는 한사코 거절하는 것인데 그것도 어쩜 그렇게 똑같은지….
석향 언니는 늘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음식을 차린다. 그러고도 차린 게 없지만 많이 먹으라고 한다. 제철이 아니어서 값이 유난히 비싼 과일을 자기들은 노상 먹는다며 내 앞으로 밀어놓는다.
“니 다 묵으라.”
내 친구 혜영이
벌써 10년이 되었다. 버몬트에 살던 중고교 동창 혜영이의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이라 한참 전화하다 끊었는데 곧 다시 벨이 울렸다. 난소암 3기 진단을 받았는데 얘기를 할까 말까 망설였다는 것이다. 억장이 무너지는 비보였다. 그 이후로 암 투병하는 혜영이에게 얻은 게 참 많았다. 모태신앙을 가지고 자란 혜영이는 워낙 신앙이 좋아서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했는데 그 모습에 엄청난 도전을 받았다. 고등학교 때 세례를 받았으나 나일론신자여서 의무처럼 교회에 다니던 내게 혜영이는 많은 신앙 서적과 테이프는 물론, 좋은 목사님 설교라는 설교는 모두 듣게 했다. 지인들이 혜영이를 위해 금식한다는 말을 듣고 생전 처음 한 끼 금식도 같이했다.
한 번은 노르웨이 고등어가 먹고 싶다고 해서 한 상자 구했는데 버몬트까지 보낼 운송편이 없었다. 생물인데 어찌 보내나 하며 기도했는데 그 응답인지 남편이 직접 가져가자고 한다. 버몬트까지는 다섯 시간이 넘는 거리다. 우리는 급히 한국 가게에 들러 먹을거리들을 샀다.
혜영이가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너무 놀라서 울 뻔했다. 가엾게 마른 몸에 거의 할머니 같아 보이는 백발의 혜영이가 서 있었다. 그래도 얘기하다 보니 옛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인근 호텔에서 자고 다음날 돌아왔다.
혜영이와 나 사이에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혜영이와 한방에서 6개월을 같이 지낸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어느 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혜영이 집에 사정이 생겨서 우리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고. 사실 그때는 혜영이가 내 단짝 친구가 아니어서 나는 남의 딱한 사정에 거절 못 하시는 엄마가 베푸신 호의로 알았다. 사실이 그랬다. 혜영이 아버님 사업이 위기를 맞아 빚쟁이들이 집에 몰려들었는데 혜영이 어머니가 고3인 혜영이를 피신시키려고 우리 어머니에게 부탁하신 것이다.
혜영이는 첼로 전공이었는데 나는 그윽하게 울리던 혜영이의 연습 소리를 좋아했다. 혜영이는 훗날 우리 언니들이 그때 얼마나 잘 해주었는지 말하곤 했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데 우리가 성탄절에 첼로 활에 칠하는 송진을 선물했다고도 했다. 어느 언니는 이랬고, 어느 동생은 저랬다면서 나보다 그때를 더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혜영이가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려주었다. 혜영이 어머니가 우리 엄마한테 부탁하신 게 아니고, 혜영이가 우리 집에 가고 싶다고 졸랐다는 것이다. 왜 그랬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못했다. 평소에 우리 집에 많이 놀러 왔었나? 그것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객식구들이 많아 남들에겐 하숙집이나 기숙사 같은 분위기였던 게 마음 편했을 수도 있다.
혜영이를 품어주신 건 지극히 우리 엄마다운 처사지만, 그래도 그 배려가 놀랍다. 식구가 많아 나 역시 자매들과 한방을 쓰고 있어서 혜영이를 받아들일 형편은 못 되었다. 그래도 엄마는 일단 허락부터 하셨던 거다.
“남을 도울 형편이 될 때 돕겠다고 하면 그런 날이 절대 오지 않는다.”
종종 하시던 엄마의 이 말씀이 내 안에 살아 있어서 나도 그렇게 앞뒤 생각 없이 잘 저지르나 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큰언니 때도 있었다. 언니가 중학교 3학년 때 친구 가정에 문제가 생겨 우리 집에서 몇 달을 함께 살았다.
꽃꽂이가 직업이었던 혜영이 어머니는 1995년에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꽃장식을 하시겠다며 바로 달려오셨다. 우리가 국화 같은 엄숙한 꽃 말고 아버지가 아침저녁으로 가꾸셨던 꽃밭처럼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정말 영정 주변을 장미 같은 화사한 꽃들로 아름답게 꾸며주셨다.
혜영이가 암과 싸우는 동안 우리는 전화를 참 많이 했다. 거의 하나님 얘기였다. 혜영이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까지도 하나님이 꼭 살려주실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결국 2년 넘는 투병 끝에 혜영이는 50이 조금 넘은, 지금 생각하면 참 젊고 예쁜 나이에 하늘나라로 갔다. 임종을 하루 앞두고 아무래도 오래 못 버틸 것 같다는 연락에 비행기를 잡아타고 혼자 버몬트로 올라갔다.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뼈만 남은 혜영이를 마지막으로 본 그날 밤, 혜영이는 떠났다. 식구들이 바쁘게 장례 준비를 하는 동안 주위에서 보내준 음식으로 꽉 찬 냉장고를 정리하고 국을 한 솥 끓여 식구들을 먹였다.
버몬트는 북쪽에 있어서 평소에도 추운 곳이다. 혜영이가 떠난 1월은 온 천지가 얼어붙어 있었다. 나는 일단 뉴욕으로 돌아와 남편과 혜영이를 보내주러 버몬트로 다시 올라갔다. 장례식에서 우리는 혜영이의 졸업연주 영상을 보았다. 당시 대학을 갓 졸업한 혜영이 큰딸 선아는 놀랍도록 차분하게 모든 절차를 진행했는데 남편에게도 운구 위원이 돼 줄 것을 부탁했다. 우리는 그날 이후로 선아의 이모 이모부가 되었다. 선아는 지금 우리 집에서 20분 떨어진 곳에서 혜영이의 병상을 같이 지켜준 남자친구 앤드루와 살고 있다.
사랑스런 오지랖꾼 상미 언니
딸아이가 보스턴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게 되어 거기 사는 상미 언니와 다시 연락하게 됐다. 상미 언니는 나보다 세 살 위인 셋째 언니 대학 동창이라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보아왔다. 자그마한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지 배터리 선전에 나오는 에너자이저 토끼(energizer bunny)를 연상케 한다. 언제 보아도 씩씩하고, 안 되는 일도 다 되게 할 것 같은 사람이다. 음식도 왜 식당을 안 차리나 싶게 잘하고, 인맥도 대단하다. 그래서 나는 모든 필요한 정보를 언니를 통해 얻는다.
사실은 그보다 8년 전, 큰아들이 딸아이와 같은 대학에 다니게 되어 언니와 연락을 했었다. 그러나 아들이라 별로 걱정되지 않아 처음에 언니네서 저녁 한 번 얻어먹은 정도였다. 그런데 딸아이를 보내게 되니 왠지 신경이 쓰이고 걱정되었다. 워낙 어리바리하고 4차원 같은 아이라 도무지 안심이 안 되었다. 그래서 딸아이에게 급하면 상미 아줌마한테 연락하라고 일렀는데 어느 날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 딸아이가 식중독으로 응급실에 갔으나 안정을 찾았고, 죽을 쒀서 가져가는 길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데가! 그 후에도 언니는 한국 음식을 사 먹이기도 하고, 국이나 반찬을 갖다 주기도 했다. 딸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그렇게 언니 신세를 졌다. 이제는 대학원을 마치고 보스턴에서 창업해 CEO가 되었지만, 언니는 아직도 딸아이의 든든한 보호자다.
딸아이 대학 졸업식에 가던 날 나는 언니에게 내가 그린 그림 한 점을 선물했다. 마음에 들지는 모르지만, 정성을 담은 선물을 하고 싶어서였다. 좀처럼 남에게 그림 선물을 안 하는 내가 유일하게 선물한 그림이다. 그동안 굉장히 고마웠다는 내 말에 언니가 말했다.
“얘, 너희 어머니가 나를 1년이나 너희 집에서 살게 해주셨잖니. 이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생각났다. 언니가 대학 3학년 때 언니 부모님이 갑자기 아프리카 가봉(Gabon)에 사업차 이민 가시게 되었다. 갈 데가 없어진 언니가 우리 집에 들어와 같이 살았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남들은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나, 워낙 우리 집엔 객식구가 더 많고, 누가 와서 몇 달씩, 몇 년씩 살고 가는 일이 별로 특별한 게 아니라서 곧 잊었던 것 같다. 그 대신 언니는 나에 대한 기억이 많았다.
“어머나, 너 어렸을 땐 가리는 것도 많고 새침하더니, 아주 사람 됐다. 에구, 하긴 나도 많이 사람 되긴 했지.”
지금도 딸아이를 보러 보스턴에 올라갈 때마다 우리 부부는 거의 매번 언니와 형부를 만난다. 밥도 같이 먹고 와인도 같이 마시고 노래방 좋아하시는 형부 덕에 노래방에서 노래도 부르고.
알고 보니 언니도 우리처럼 보스턴 근처에 오가는 친구 아들딸들의 대모 노릇을 하고 산다. 한번은 우리가 뉴욕으로 돌아갈 때 언니의 부탁으로 친구 아들을 집에 데려다준 적이 있다. 언니는 우리와 많이 닮았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할 것 같으면 미리 나서서 해결하는 오지랖 꾼이라는 점에서.
50년 긴 다리를 건너서 (그림, 크기 중)
한국 최종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인 남편에게는 서울 친구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있었다. 어떤 면으로는 그리운 만큼 그 친구들을 더 소중하게 여겼는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다닌 중고등학교에는 한국 학생이 거의 없어서 대학에 입학해 갑자기 만난 한국 친구들에게 무한한 감격과 안도감이 있었을 것 같다. 미국에서 만난 그의 친구들도 비슷하다. 주로 1970년대에 이민 온 이들은 대학에서 서로를 발견하고는 아주 쉽게 친해졌다. 그래서 남편의 대학 동창들은 마치 한국의 고등학교 동창처럼 관계가 끈끈하다.
그런데 10여 년 전, 친한 전도사님이 우리 집에 놀러 오셨다가 초등학교 때 여자친구를 찾고 싶다는 남편의 장난기 섞인 말에 동조해서 동창 찾는 인터넷 카페를 찾아주셨다. 남편이 접속하기 무섭게 아는 친구가 연결됐고, 그때부터 흥분한 남편이 친구 찾기에 나섰다.
남편의 기억력은 내 상상을 훨씬 넘어섰다. 서울에서 대학 2학년까지 마친 나는 친구가 많아서인지 초등학교 동창이라곤 골목에서 같이 뛰놀던 배꼽 친구 여은이 말고는 별로 생각나지 않는데 남편은 시시콜콜 생각나는 친구가 많았다. 당시 남편의 학년에는 한 반에 90명씩 18반이나 있어서 동급생들만 1,600명이 넘었다는데 그들을 다 기억해내려 들었다.
남편은 한동안 동창 카페에 빠져 사는 듯했다. 아직은 50년 전의 꼬마 얼굴로 남아있는 친구들을 떠올리며 행복해했다. 개중에는 기억이 선명한 친구도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덕영 씨다. 1학년 때 남편이 반장이고 덕영 씨가 부반장이었다는데, 덕영 씨가 소풍날 남편 대신 담임선생님의 도시락을 싸 갔다는 증언을 해주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을 그렇게 세세히 기억하는 게 놀라웠다.
그러던 어느 날, 덕영 씨가 군에서 제대한 아들이 복학하기까지 남는 시간에 어학연수를 가려고 하는데 뉴욕에 학교 좀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필시 그냥 학교만 알아봐달라는 뜻이었을 텐데, 남편은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대학을 택했다. 당연히 주말마다 집에 데려오겠다는 뜻이었다.
공항에 덕영 씨 아들 윤석이를 데리러 간 날, 아무 사정도 모르는 윤석이는 남편과 자기 아빠가 50년 전에 헤어진 후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이라는 말을 듣고는 놀라는 눈치였다. 5월에 어학연수가 끝날 때쯤 덕영 씨 부부가 때맞춰 미 동부 여행을 왔다. 남편과 덕영 씨는 그야말로 눈물의(?) 상봉을 했다. 덕영 씨 부부는 단체관광이 끝난 후 우리 집에서 며칠 묵었다. 그사이에 우리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우리 딸의 조정경기를 함께 보고 왔다. 서울에 돌아갈 때쯤 되니 남편과 덕영 씨는 50년 세월을 함께한 친구처럼 허물이 없어졌다. 나와 윤석 엄마도 오래 알았던 친구같이 친해졌다. 이제는 서울 갈 때마다 같이 밥이라도 먹고 오는 사이가 되었다.
그 외에도 뉴욕 근처에 들르는 초등학교 친구들이 있으면 남편은 만사를 제치고 만나러 갔다. 그렇게 많은 친구를 새로(?) 사귀게 되었고, 친구들은 친구들대로 우리가 서울에 갈 때마다 번개팅으로 모인다. 본래 부인들은 안 따라가는 동창 번개 모임에 특별 손님으로 따라다닌 덕에 이제는 나도 그 학교를 나온 듯 착각할 지경이 되었다. 심지어 남편이 나에게 동창회장을 맡으라고 농담할 정도로.
4학년 때 전학 왔다는 짝퉁(?) 동창 준이 씨는 친화력이 남달라서 이제는 대학 동창보다 더 친근하게 느낄 정도가 되었다. 팬데믹이 있기 전해에 뉴욕에 여행 왔던 준이 씨네와 파리와 벨기에로 열흘간 여행을 다녀왔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살아왔는데 한순간에 이렇게 친해질 수 있는 건 역시 합숙의 힘이다.
남편은 생각지 않은 해프닝으로 많은 친구를 찾았다. 하지만 정작 찾고 싶었던 첫사랑 소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페루 선교사님 (그림, 크기 대)
우리가 집에서 가끔 성경 말씀이나 펴보며 감동하고 있을 때, 이국땅에서 고생을 감내하며 사역하시는 선교사들이 많이 계시다. 그중에 친하게 지내는 페루 선교사님 부부가 있다. 원래 교회 선교부에서 만났는데 그때는 평범한 집사님들이었다. 어느 날 페루 선교사로 파송되셨는데 알고 보니 그리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나 보다. 오랫동안 아이가 없어서 “어느 어느 해까지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선교사로 헌신하겠습니다” 하고 서원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평소 유머 감각이 뛰어난 박 선교사님은 “제가 서원을 잘못했어요. 아이를 주시면 헌신하겠다고 했으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 텐데요” 하시며 껄껄 웃으셨다. 아무튼, 10년 넘게 리마(Lima)와 쿠스코(Cuzco) 두 군데에 선교관을 짓고 원주민 목사님들을 섬기고 계시다.
우리 부부는 2012년 여름, 우리 아이 둘을 포함한 열일곱 명의 고등부 학생을 데리고 쿠스코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왓사오(Huasao)에 갔다. 이런 선교여행은 말이 선교일 뿐 선교사님께 민폐를 끼치는, 아이들의 여름방학 봉사활동을 위한 일종의 배낭여행이다. 가기 전에 여름성경학교와 의료봉사, 안경 사역 등을 위해 6개월간 교육받았지만, 우리가 얻는 값진 경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현지인들에게 해준 거라야 가져간 비타민과 돋보기 등이 전부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비용을 한 푼이라도 줄여 나머지는 선교비로 드리고 싶어서 바닥에 침낭을 깔고 자면서 아이들을 가져간 음식으로 거둬 먹였다. 더운물이 거의 나오지 않아 2주 일정이 끝나갈 때쯤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씻지 못해 머리는 떡이 지고 그야말로 노숙자 비슷해졌다. 그래도 거기까지 갔는데 아이들에게 마추픽추(Machu Picchu) 정도는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하여 고구마 종류인 유카(Yuca)와 옥수수를 잔뜩 삶아 배낭에 넣고 당일로 다녀왔다. 이런 여행을 다녀오면 아이들은 문명을 누리는 자신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깨닫고 두어 달 정도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우리가 선교사님을 다시 방문한 건 몇 년이 지나서다. 본래 건축설계사였던 박 선교사님이 직접 선교관을 설계해 지으시고 내부공사에 들어갔는데 우리도 뭔가를 돕고 싶었다. 손재주 좋고 실력이 건축업자 뺨치는 후배 부부에게 좋은 일 좀 하자고 꼬드겨 함께 갔다. 박 선교사님과 나이가 같아 만나면 곧 친해질 것 같았는데 우리 짐작이 맞았다. 후배는 두 주간 본관 타일 공사를 예쁘게 마무리해주었다.
공사현장에서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나도 유치부실 벽에 벽화를 그릴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를 얻었다. 아무 준비 없이 가서 그냥 동네 페인트 집에서 서너 가지 원색을 사서 그렸지만, 그리는 내내 참 행복했다.
그곳은 고산지대라 음식 하는 데 기술이 필요하다. 이제는 페루인이 다 되신 사모님이 조그만 방에서 미역국이며 냉면이며 전기밥솥 두 개로 그야말로 마술처럼 음식을 해내신다. 신기한 건 우리가 그냥 교회 집사로 알고 지내던 때의 조용하고 말수 적은 사모님이 하루 종일 소녀처럼 까르르 까르르 웃고 말수도 많아지셨다는 거다.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하시던 실력으로 이삼십 명 페루 할머니들과 아기들만 쪼르르 앉아 있는 주일예배 때 키보드를 치며 연신 웃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 내면의 만족감이 참 부러웠다.
내 인생에 잊지 못할 사건도 있었다. 박 선교사님이 뜬금없이 나에게 특송을 불러달라셨는데 내 평생소원 중 하나가 예배시간에 특송 부르는 거였다는 건 아마 하나님만 아셨을 거다. 노래를 잘해서가 아니다. 못하기 때문에 내 소원이 된 거다. 성악 레슨을 받고 예배 중 특송을 하는 가당찮은 상상을 하면서 속으로 웃곤 했는데 정말 기회가 올 줄이야! 마침 아는 사람도 없고, 잘 부르지 못해도 평가할 사람이 없는 것 같으니 무슨 상관이랴. 곤란해하는 남편을 졸라 단행하기로 했다. 곡은 <오, 놀라운 구세주, 내 주 예수>를 골랐다. 내가 알토로 화음을 맞출 수 있는 몇 안 되는 찬송이다. 이 곡을 부르면서 내가 더 큰 은혜를 받았다. 마지막 3절은 거의 울면서 불렀다. 이제 생각하니 그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었던 것 같다.
후배 부부가 돌아가고 우리는 박 선교사님과 쿠스코를 떠나 4박 5일 일정으로 오지에 있는 선교지를 다녀왔다. 그동안 우리는 꽤 위험한 일도 겪었는데 박 선교사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의연하셨다. 선교지는 어디를 가나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깨닫고 감사하게 했다. 그리고 가난한 가운데서도 서로 나누며 사는 페루 사람들의 후한 인심에 감동했다. 넉넉할 때보다 부족할 때 오히려 남을 돌아보고 나누는 것, 그게 배고픔을 경험한 사람이 갖는 공감 능력이 아닌가 싶다.
박 선교사님은 모든 아이를 내 아이처럼 돌보시는 것 같다. 만일 자신의 아이가 있었다면 안 그러셨을까? 나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너무 내 아이와 남의 아이를 구분해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 자녀는 우리의 소유가 아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자녀를 맡아 기르고 보살피는 보호자일 뿐이다. 그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고 사는 나도 박 선교사님을 보면서 반성하곤 한다. 부모가 자녀의 보호자일 뿐이라면 다른 집 아이들도 내 아이처럼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선교지에는 가지 못하더라도 박 선교사님처럼 주변의 힘든 아이들을 거두고 돌볼 수 있지 않을까?
보고 싶다, 리오야 (강아지, 십자가 그림, 크기 소)
우리 딸은 서너 살 때부터 강아지를 기르고 싶어 했다. 내가 강아지를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계속 미루면서 대신 각종 봉제 강아지를 사주었다. 그래도 딸아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딸이 열두 살쯤 되었을 때 하도 귀찮아서 털 안 빠지고, 냄새 안 나고, 너무 크지 않고 이러저러한 강아지라면 한 번 고려해 보겠노라고 대답했다. 세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까다로운 조건을 달아서. 그런데 어느 날 그런 강아지가 나타난 것이다.
“엄마, 이 강아지는 보러 갈 수 있대!”
딸이 부엌에서 추수감사절 음식준비로 바쁜 나에게 외쳤다. 우리 딸이 흥분해서 말한 강아지는 하얀 털에 다리가 짧고 귓속이 분홍색인 귀여운 웨스티(Westy) 종이라 개밥 선전에도 자주 나온다. 이 강아지를 찾기까지 딸아이는 매일 유기견 사이트에서 검색했다. 가끔 원하는 강아지를 찾기도 했지만, 새끼일수록 경쟁이 심해서 200:1이 될 때도 있었다. 그런 딸이 측은해서 애견가게에서 사주겠다고 하니 절대 안 된단다. 영리 목적으로 개를 길러 파는 사람들에게 쉽게 돈을 벌게 해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때까지 원하는 강아지가 나올 때마다 몇 번을 신청해도 보러 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터라 나도 흥분해서 음식 하다 말고 강아지를 보러 가기로 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50분쯤 떨어진 유기견 임시보호소를 찾아갔다. 보통은 사이트에 사진이 뜨는데 이 아이는 사진도 없었다. 추수감사절 이틀 전이라 다들 바빠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나 보다.
보호소에 도착해 조금 기다리자 자원봉사를 하는 작은 체구의 할머니가 강아지를 데리고 나오셨다, 크기는 내가 원하던 것보다는 조금 컸고 다리도 어중간하게 긴 데다 털은 쥐 뜯어 먹은 듯 듬성듬성 잘라주어 아주 볼품이 없었다. 게다가 이 녀석이 큰 방을 돌면서 몇 걸음에 한 번씩 오줌을 누는 게 아닌가. 맙소사! 그때만 해도 그게 낯선 환경에서 개들이 흔히 하는 영역표시라는 걸 몰랐던 나로서는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내 얼굴을 보고 대충 상황이 짐작됐는지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아무리 아이가 원해도 일단 입양하면 모든 일은 엄마 몫이다. 만일 못 기를 것 같으면 다시 받아줄 수 있지만, 입양비 350달러는 환불이 안 된다.
그래도 일단 돌려줄 수 있다는 말에, 게다가 이런 낙후한 환경에 절대 강아지를 두고 갈 수 없다는 딸아이의 부탁에 일단 집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차 뒷자리에 태우자 얼마나 얌전히 오는지 그것 하나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도 강아지가 한 번도 소리 내는 걸 들어보지 못했다. 혹시 목소리가 안 나나?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더니 낯설어서인지 왕왕 짖어댄다. 아이고, 다행이다. 그 후 딱 이틀 만에 대소변도 가리게 되었고 심성이 느긋하고 착한 강아지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할머니께 들은 바로는 뉴욕 시내에서 한 달쯤 유기견으로 떠돌다가 보호소에 오게 되었단다. 길을 잃어버렸나, 주인이 버렸나 내내 궁금했지만, 알 방법은 없었다. 동물병원 수의사 말로는 유치가 아직 빠지지 않은 게 태어난 지 한 6개월쯤 되었을 거라고 했다.
강아지 이름은 리오(Leo)로 지었다. 우리 딸이 어릴 때 좋아하던 만화주인공 흰 사자 리오를 닮아서였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리오가 사람을 별로 따르지 않는 거였다. 우리가 하루 종일 나갔다 와도 한 번 쓱 쳐다보면 그만이었다. 옆에 앉히고 쓰다듬으려 하면 슬쩍 도망가서 남편은 도망치지 못하게 꼬리를 꼭 쥐고 있기도 했다. 심지어 아이들이 고양이와 잡종이 아닐까 억측할 정도로 고양이 성품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리오를 우리 곁에 자진해서 오게 할 방법이 딱 하나 있었다. 뭔가를 먹거나 과자봉지 부스럭거리는 소리 같은 것을 내면 멀리서도 귀신같이 알아듣고 삽시간에 눈앞에 와 있었다. 유기견일 때 굶고 지낸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해서 포만감을 모르는 리오는 눈앞에 있는 음식은 무조건 먹어치웠다. 플라스틱을 주워 먹어 병원에 간 일도 있고, 우리 없을 때 사료 봉지를 발견하고 거의 다 먹어버린 일도 있었다. 리오는 사료의 형태를 겉에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뱃가죽이 늘어나 있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태어난 후 일정 기간 안에 충분한 사랑을 받고 사회성도 길러야 하는데 우리 리오는 아마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한번은 친하게 지내던 전도사님께서 리오를 위해 기도도 해주셨다. 어릴 때 받은 상처를 치료해 주시라고.
비록 아기 때의 상처는 있었지만, 리오는 우리 집에서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우리 집을 방문한 사람들도 모두 리오를 좋아했다. 리오가 우리 집에 온 첫해에 우리는 가족 크리스마스 카드에 리오를 대표로 내세웠다. 싼타 모자를 쓴 리오는 참 사랑스러웠다. 세상없이 과묵하고 순한 리오는 우리에게 반려견이 아니라 그냥 가족이었다.
열네 살 되던 해 리오는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 집을 다녀간 모든 사람이 리오를 기억하고 그리워할 것이다. 지금도 리오를 생각하면 나는 콧등이 시큰해진다. 사람들은 리오가 우리 집에서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고 위로하지만, 엄마인 나로서는 잘 해주지 못한 것만 생각난다. 바다에 가면 파도를 향해 달려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그렇게 좋아했는데, 해변에서 아무거나 주워 먹고 탈이 난다고 자주 데려가지 않았던 게 다 후회된다.
리오는 화장했다가 그해 봄, 바닷가 집 능금나무에 꽃이 피었을 때 그 아래 묻어주었다. 작은 나무 십자가에 “Leo Kim 1/16/20”이라고 새겨 무덤 위에 세웠다.
여행지마다 반기는 친구가 있다면
팬데믹을 겪으며 여행환경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그중 하나가 렌터카 업체의 도산이다. 여행이 멈추자 많은 렌터카 업체가 문을 닫았다. 그 여파로 차를 빌리는 비용은 엄청나게 비싸졌다. 남편과 나도 하와이 여행길에 로스앤젤레스에 들러 내 친구 경순이를 만나기로 했기에 렌터카를 검색해보니 평소 일주일에 100달러 남짓하던 게 하루에 100달러 가까웠다.
로스앤젤레스에 가기 전, 아직 망하지 않고 살아 있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렌터카 회사에 제일 싼 값으로 예약을 마쳤는데 경순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틀 있는 건데 경순이 남편이 도착부터 떠날 때까지 계속 운전해줄 테니 그냥 오란다. 평소 남에게 민폐 끼치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남편이 듣고는 펄쩍 뛰었다. 그러나 경순이의 마음 씀씀이를 알기에 공항에서는 택시 타고 들어가고 최소한의 신세만 지자고 설득했는데 웬걸, 경순이가 막무가내로 공항까지 마중 나왔다.
우리 집에 손님이 많이 오지만 공항에 마중 나가는 것은 노인이나 미국에 처음 오는 경우뿐이다. 그런데 경순이 부부는 차를 주차하고 짐 찾는 데까지 들어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경순이가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남편도 얼떨결에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올랐다. 경순네는 한인 타운에서 맛있는 저녁에 빙수와 커피까지 사주며 장장 일곱 시간이나 같이 놀다가 우리를 호텔에 데려다주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동창 부부들을 불러 여자들은 내가 좋아하는 분식집으로, 남편들은 자기들끼리 점심을 먹고 찜질방 나들이를 했다. 떠나는 날은 거기 계시던 친한 선교사님께서 공항까지 데려다주시겠다고 하여 경순이의 신세를 지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아쉽다며 우리에게 와서 한 시간 남짓 머물다 갔다.
우리 부부도 손님 접대에는 웬만큼 이력이 있다. 그런데 경순네와 견주니 우리가 그간 너무 대충한 것 같았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우리가 가는 도시마다 팔 벌려 반겨주는 친구가 있다면 어떨까? 친구가 없이도 좋은 여행을 할 수 있겠지만, 친구 때문에 이처럼 마음이 따뜻해지고 정이 넘치는 여행과는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지 않을까? 환갑이 넘은 남자들이 그렇게 금세 친해질 수 있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십년지기나 되는 듯 만난 지 이틀 만에 찜질방에 가다니! 앞으로도 가는 곳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우정을 쌓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에 마음이 설렜다.
재테크보다 우테크 하세요
멋쟁이 외할아버지 덕에 법대에 진학한 우리 어머니는 늘 당신이 친구가 없는 게 학교 탓이라고 하셨다. 엄마의 대학에는 거의 남자들이고 여학생이 극히 적어서 다른 과에서 몇 명을 꾸어(?)왔을 정도였다고 하시면서 여자대학에 간 친구를 부러워하셨다. 그런데 내 생각에 엄마가 친구가 많지 않은 진짜 이유는 아버지 뒷바라지에 전념하시느라 친구들과 별로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미국에서 살게 된 내 경우도 마찬가지다. 동창들은 거의 서울에 있고 자주 봐야 1년에 한 번 서울에 가서 한두 번 볼 수 있다. 요즘은 재테크보다 우테크를 해야 한다는데 정말 맞는 말이다. 친구도 관리해야 한다. 만나자고 할 때마다 열심히 만나야 한다. 이제 서울의 친구들은 내 남은 생애에 잘 만나야 30~40번 만날 수 있다.
서울에 사는 친구 중 연선이는 단연 제일 오래된 친구다. 1972년에 예원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아시아에서 제일 학생 수가 많다던 종암초등학교 졸업생은 우리 둘뿐이었다. 초등학교에서는 같은 반을 못 해봐서 거의 처음 보는 사이였는데, 연선이네 집과 우리 집이 가까워서 하굣길에 예원학교가 있는 정동에서 곧잘 같은 버스를 탔다. 우리는 1시간 동안 재재거리며 즐겁게 돌아왔다.
연선이는 피아노, 나는 미술 전공이었지만 중학교 때는 전공과 상관없이 같은 반이 되었다. 그 후 고등학교 3년과 내가 파리로 떠날 때까지 8년 동안 단짝 친구로 지냈다. 그 이후로도 연선이만큼 계속 친하게 지낸 친구는 많지 않다. 열세 살 소녀들이 할머니가 되기까지 50년 동안 우정을 쌓으면서 이젠 완전히 허물없는 친구가 되었다.
우리가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는 이유 중 하나는 연선이 남편 선한 씨다. 결혼 전 연애하던 시절에 더블데이트를 몇 번 했는데, 남자들끼리도 궁합 맞는 사람이 있는지 남편과 선한 씨는 보자마자 서로 좋아했다. 선한 씨는 대장암 명의로 알려진 의사지만 우리한테는 40년간 한결같은 분이다. 국제학회에 자주 다니는 선한 씨가 한 번은 콜롬비아(Colombia)에서 학회가 있었는데, 일전에 우리가 다녀온 페루(Peru)의 마추픽추(Machu Pichu) 이야기를 듣고는 같이 가자고 졸랐다. 마추픽추가 볼만은 하지만 다시 갈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와는 달리,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걸 좋아하는 남편이 선뜻 가자고 나섰다. 우리는 페루의 수도 보고타(Bogota)에서 연선이 부부를 만났다. 학회에서 현지 사람들이 나와서 관광 안내를 해주어 덕분에 좋은 구경도 할 수 있었다. 마추픽추도 친한 친구와 다시 가니 새롭게 보였다.
이제 곧 선한 씨가 은퇴하면 우리는 여행 친구가 될 것 같다. 생각만 해도 기분 좋고 설렌다. 친구만큼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존재도 드물다. 어릴 때부터 우정을 쌓은 친구는 더욱 그렇다.
행복 바이러스 경태 엄마 (Paris 그림, 크기 대)
9.11이 일어나기 1년 전인 2001년경, 한 모임에 초대받았다. 회원은 우리까지 일곱 가정이었는데 우리만 빼고 대부분 이민 온 지 10년 남짓 된 분들이었다. 그 모임에서 경태 엄마를 만났다. 처음 몇 년은 특별히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그저 한 달에 한 번 만나 웃고 떠들다 헤어지는 사이였다. 그런데 한 10년 사귀면서 경태 엄마와 나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보다 세 살 위라서 언니뻘이었지만, 오랫동안 서로 경태 엄마, 앤 엄마, 하고 불러서 호칭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경태 엄마는 환갑이 훌쩍 넘었지만 마음이 소녀 같은 분이다. 물질적인 복은 많이 받지 않았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볼 줄 아는 신기한 눈을 가졌다.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은혜도 받았다. 그래서 언제나 까르르 까르르 웃는다. 마당에 피는 들꽃들이 자기가 심지도 않았는데 어찌 이렇게 예쁘게 피어 자기를 감동케 하냐며, 스스로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경태 엄마는 이민 와서 열심히 살았지만 아직도 집 장만을 못 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주위 사람까지 후하게 챙기느라 돈 모으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영주권도 두 아들이 대학을 졸업한 후 어렵게 받았다. 다행히 잘 자란 두 아들이 틈틈이 용돈을 찔러주는데 그걸 또 그렇게 행복해한다. 경태 엄마는 항상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깨닫게 해주는 분이다.
몇 년 전부터 파리에 자주 다니면서 그 아름다운 도시를 소개하고 싶었던 사람이 바로 경태 엄마다. 얼마나 좋아하실까. 행복해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일단 전화로 파리에 같이 가자고 초대했더니 꺄악! 믿을 수 없다고 야단이었다. 경태 엄마께 파리를 소개할 생각에 괜히 내가 더 들떴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마음 착한 친구 재현 엄마도 함께 가자고 초대했다. 이들은 은근히 닮은 데가 있다. 순수하고 남을 질투하지 않는 예쁜 마음을 가졌다.
평생 나도 몇 번 안 해본 여자들만의 여행은 아주 편하고 즐거웠다. 두 아줌마와 뉴욕 케네디 공항에서 만나 여덟 시간 걸려 파리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며칠 함께 여행한 것처럼 손발이 잘 맞았다. 파리에서는 거의 모든 데를 걸어 다녔다. 아침은 집에서 맛있는 빵, 과일, 요구르트 정도로 먹었는데 파리의 빵이 워낙 유명하고 요구르트도 맛있어서 호텔 아침 식사가 전혀 부럽지 않았다. 점심이나 저녁 중 한 번은 좋은 식당에서 분위기 내며 즐겼다.
경태 엄마가 화사한 연보랏빛 캐시미어 스웨터를 만지작거리며 망설이기에 재현 엄마와 둘이 회비로 사서 선물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행복해하면 옆에서 보는 사람도 같이 행복하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옳았다. 행복 바이러스 경태 엄마 덕분에 여행 내내 우리도 행복했다.
인생 황금기를 같이할 친구
미키(Miki)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나와 미키가 동갑인지 몰랐다. 비영리 봉사단체, 패밀리 터치(Family Touch) 이사가 된 지 1년도 안 돼 공석이 된 이사장 자리에 만장일치로 추천받은 미키가 뛰어난 리더십과 넓은 인맥을 발휘하는 것을 보고 그녀가 나보다 손위려니 했다. 그런데 그 부부와 우리 시골집에서 하루를 지내고 미키가 나와 동갑내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같은 나이에 아직도 소녀 같은 그녀의 순수함에 반해버렸다.
미키의 남편 현 박사님은 우리 남편보다 다섯 살이 위인데, 알고 보니 돈암초등학교 선배여서 곧바로 “우리 후배님”이라는, 농담 섞인 애칭으로 부르셨다. 이렇게, 살다 보면 보자마자 호감 가는 사람들이 있다. 나이 들어 사귀어도 처음부터 언제 다시 만날까, 그날을 궁리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우리가 두 번째 만났을 때는 비슷한 여행계획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시간을 맞춰 함께 갔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 나이에 만나 이렇게 금세 호감을 갖게 된 데에는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과 가치관이 비슷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 아닌가 생각했다.
김형석 교수님은 60세부터 75세까지가 인생에서 제일 좋은 때였다고 말씀하셨다. 어느 정도 현명해졌고, 아직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건강한 나이라는 것이다. 미키와 나는 바로 그 제일 좋다는 시기에 한 발자국 같이 들여놓았다. 이 인생의 황금기를 보람된 일을 함께하면서, 혹시나 어려운 일이 닥치면 다독이고 나누며 살고 싶다. 서로 배우고 길동무하며 같이 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현 박사님이 아이슬란드에서 100번째 마라톤을 뛸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도 바닷가 동네에서 열리는 마라톤에서 5km를 같이 뛰기로 했다. 마라톤 경험이 없는 우리가 응원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니 뛴다기보다 걷는 수준이겠지만…. 사람들은 인생을 마라톤에 비교한다. 그렇다면 혼자 뛰는 것보다 친구와 함께할 때 더 신나고 힘이 나지 않을까? 인생의 마라톤을 함께 뛸 친구를 만나는 건 큰 행운이다.
여생을 어떻게 살까?
시어머님과 친정어머니 두 분을 1년 안에 보내드리면서 남편과 나는 많은 생각을 나눴다. 어떻게 하면 외롭지 않게 남은 생을 보낼 것인가, 치매 같은 불치병에 걸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남편은 무조건 스위스로 가겠다고 한다. 스위스에서는 자기 의사대로 생을 마감할 수 있다. 나는 어떻게 죽는가보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더 관심이 있다. 그래서 주변의 나이 든 분들을 관찰하는데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고 할 만한 분을 만나기 힘들다.
다행히 우리에겐 그런 분이 계시다. 남편의 대학 절친 필재 씨의 어머니시다. 필재 씨 어머님은 여러 면에서 멘토로 삼고 싶은 분이다. 항상 외로워하셔서 우리 마음을 힘들게 하셨던 친정엄마와는 달리, 90이 가까운 연세에도 젊은이 못지않게 바쁘게 사신다. 두 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우리는 부모님같이 자주 뵙고 싶어서 서울에 갈 때마다 전화를 드리는데 친구 모임이다, 성가대 모임이다, 선약 때문에 시간 약속을 하기 쉽지 않다.
생각해보니 내가 왜 어머님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어머니는 우리가 20대 초반에 처음 뵈었을 때부터 아들 친구지만 한 번도 말을 놓으신 적이 없다.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하시고 칭찬을 잘하시는 것은 물론, 애정표현도 서슴없이 하신다. 그 연세에도 카톡으로 하트나 이모티콘을 보내시고 “사랑해요, 보고 싶어요, 우리 곧 만나요” 같은 따뜻한 말씀을 남기신다. 항상 내가 얼마나 복 많은 사람인지 가르쳐주시면서, “그러니 항상 감사하며 사세요. 인생 짧아요”라고 일깨워 주신다. 이미 내 나이에도 어머니처럼 하기 쉽지 않은데 이런 점은 정말 닮고 싶다.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대접하시는 것을 좋아하셔서 우리는 서울에 가면 눈 딱 감고 어머니께서 사주시는 밥을 감사히 먹는다. 그 대신 미국에 오시면 우리가 대접한다. 친정엄마가 살아 계실 때는 우리 대신 엄마를 찾아주시고, 식사도 함께하셨다. 딸아이가 서울에서 몇 달 인턴을 하는 동안에는 냉장고에 틈틈이 먹을거리를 채워 넣어주셨다. 지금도 딸아이가 보고 싶다며 문자를 보내시고, 딸아이도 할머니를 무척 따른다. 우리도 나이 들어 어머님처럼 젊고 따뜻하게 살 수 있으려나? 정말 그러면 좋겠다.
* 내 삶의 멘토 (책 맨 마지막 페이지에 들어갈 글)
2010년 여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미국 물리치료사라는 큰 꿈을 안고 뉴저지의 한 대학교에 편입하여 다니던 중 학업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갑자기 허리디스크 증상이 심해져 계획보다 일찍 은퇴를 결정하셨고, 더는 나에게 경제적 지원을 할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조금만 더 하면 대학원과 면허시험에 필요한 모든 과목을 이수할 수 있는데 멈춰야 하니 너무 아쉬웠다. 또 뉴저지연합장로교회에서 청년부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한창 부흥하고 있던 청년부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어 고민하며 기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내 사정을 알게 된 청년부 전도사님께서 뜻밖의 제안을 하셨다. 교회에 도와줄 수 있는 가정이 있으니 그 댁에서 지내면서 학업을 이어가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도움에 감사했으나 선뜻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때까지 한 번도 남의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어색했고, 남에게 피해 주는 것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다.
호의를 제안하신 김재덕, 송순빈 집사님 부부는 청년부 모임을 지원해주셔서 안면은 있었지만 잘 알지는 못했다. 좋은 마음으로 도와주시는데 혹시 내가 실망하시게 하거나 결과가 안 좋을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렇게 1~2주 고민하고 기도한 후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집사님 댁에 신세 지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처음 댁에 간 날 가족이 여름휴가를 가셔서 돌아오실 때까지 혼자 강아지 리오와 지냈다. 너무 신세 지는 것 같아 집안 바닥 청소를 하면서 보냈다. 얼마 후 돌아오신 집사님 부부는 나를 조카같이 편하게 대해 주셔서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나는 두 분 집사님 댁에 살면서 스스로 다짐했다. 반드시 성공해서 집사님들처럼 남을 돕는 사람이 되겠다. 나중에 집사님들께 꼭 보답하겠다. 매일 집사님 가정을 위해 기도하겠다. 이 세 가지를 매일 마음에 새기며 기도했다.
집사님 댁에서 나는 단순히 경제적인 부담만 던 게 아니고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귀한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동안 부를 이룬 사람들의 탐욕과 거만함을 보고 들어왔는데 집사님 부부는 달랐다. 항상 겸손하고 부지런하게 사셨다. 또 브루클린에서, 한국에서, 부모님들이 방문하실 때마다 지극 정성으로 공경하는 모습에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4개월여가 흘렀다. 집사님 부부 덕분에 나는 미국에서의 계획을 마무리 짓고, 남은 학위 하나를 마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송 집사님 댁 2층 작은방에서 기도했던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 지금은 미국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아름답고 지혜로운 아내와 세 자녀의 축복까지 덤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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