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주무시고 가실래요?

주무시고 가실래요? (바다 그림, 크기 대)

어른 열여섯에 아이 셋. 또 이렇게 많아졌다. 늘 시작은 그렇지 않은데 결국 식탁에 다 앉지 못할 만큼 인원이 늘어난다. 본래 계획은 여름이 가기 전에 타지에 사는 아이들과 바닷가 집에서 일주일을 지내는 가족 행사(Family Week)였다. 아이가 넷인 우리 집은 큰아이 둘이 결혼한 뒤로는 우리 식구만 모여도 어른 여덟에 아이가 둘이다. 휴~! 그런데 이번엔 독일에 사는 조카 부부가 아홉 달 된 아기를 데리고 우리 집에서 5주간 머물게 되었으니 자동 합류.  

독일 조카네를 위해 그동안 오래 못 본 근처의 다른 조카들도 불렀다. 갓 결혼한 조카 주서와 에밀리 그리고 주헌이와 여자친구 리사. 이게 끝이 아니다. 갑자기 워싱턴 DC에 사는 막냇동생이 뉴욕에 온다며 이틀만 재워 달란다. 까짓거, 방이 있으니 또 흔쾌히 받았다. 이렇게 우리 집은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로 북적인다. 

8년 전에 바닷가 동네에 방 세 개짜리 작은 집을 샀다. 우리도 나이 들었으니 가끔 휴식할 시골집이 필요했다. 그런데 몇 년 후 결혼한 아이들이 제 식구들을 데리고 오니 방이 모자라 집을 좀 늘렸다가 결국 대대적인 증축까지 하게 되었다. 사실 우리 식구만 생각하면 굳이 고생하며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바닷가 집을 좋아하게 된 조카나 친구들이 자주 함께하게 되니 그럴 때 누군가 거실에서 자야 하는 게 영 불편했다. 방이 많이 늘어난 건 그 때문이다.

뉴욕은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곳이다. 누구나 한 번쯤을 가보고 싶은 도시이기 때문이리라. 자연히 미국의 다른 도시에서, 한국에서 참 많은 사람이 우리 집에 들른다. 다행히 우리 부부는 집에 손님 초대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툭하면 아침이나 먹으러 오라고 부르고, 간단히 밥이나 먹자고 부르고, 어떤 땐 자고 가라는 말도 겁 없이 하곤 한다. 한국같이 먼 데서 오면 무조건 비싼 호텔 말고 우리 집에서 지내라고 강권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남편 친구 아들 진길네 부부가 한 살 된 딸과 이틀간 지내다 갔다. 

뉴욕은 뉴욕이라서, 시골집은 하늘과 바다가 예쁜 동네라서 자주 사람들이 찾는다. 바닷가 집에 초대할 땐 “와서 하룻밤 주무시고 가세요”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뉴욕 시내에서 160km 떨어진 곳이라 어차피 당일치기하기엔 좀 멀다. 하지만, 집에 돌아갈 걱정 없이 늦게까지 놀다가 맛있는 아침 식사까지 나누고 나면 그리 친하지 않았던 사이라도 곧 가족처럼 친근해지기에 우리는 하룻밤 머물기를 권한다.

바닷가 집에서 보낸 ‘가족 주일’ 아니 ‘사촌 주일’은 성황리에 끝났다. 일주일 동안 식사 때마다 전쟁 치르듯 열여덟 명이 먹고 마시고 떠들다가 갔다. 그동안 새로 생긴 조카며느리들이 처음 만난 사촌들과 친해진 아주 좋은 기회였다.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아이들이 와르르 몰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집을 두루 청소하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우린 좀 과하다 싶게 손님을 치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대일지 쓰기

그간 두서없이, 닥치는 대로 사람들이 좋아 많은 사람을 초대하고 식사를 대접했다. 그런데 오늘 한 무리의 손님이 떠나고 나자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동안 그 많은 손님의 끼니를 내가 어떻게 해결했지? 그러자 손님 초대일지 같은 걸 한번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에 누가 왔다 갔는지, 어떻게들 오게 되었는지, 사람들을 어떻게 먹였는지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 써보기로 했다. 재미있을 것도 같고 유용할 것도 같았다. 같은 사람이 두 번째 방문하면 이전과 다른 식사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일지는 곧 내 생활을 담은 일기가 될 수도 있을 거고. 그러다 보면 우리가 왜 이렇게 손님 초대를 많이 하는지 그 실마리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초대일지를 쓰기 시작하고 지인들을 만났을 때 혹시 우리 집에서 밥 먹은 적 있냐고 물어봤다. 언젠가 들렀더니 막 수프를 끓였다며 먹고 가래서 먹었다, 우연히 김밥 쌀 때 들렀다가 같이 먹었다는 등 많은 사람이 나는 생각나지 않는 소소한 일까지 알려주었다.

처음엔 그저 기록을 위해 일지를 썼는데 예전 기억까지 떠올려 기록하다 보니 글 쓰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내 머릿속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라 그랬는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내가 살아온 얘기하듯 써서 그랬는지, 다 쓰는 데 두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주로 스물두 살에 만나 거의 그 두 배를 살아온 우리 부부 이야기인데, 지극히 평범한 우리 일상이 좀 특별하게 보인다면 그간 세상이 많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1973년에 미국에 이민 온 남편은 아직도 한국의 70년대 정서에 머물러 있고 1980년에 고국을 떠난 나도 비슷하다. 유난히 남들을 거두고 먹이셨던 양가 부모님을 보고 살아서인지 그 옛날 인심 좋던 세상을 떠나보내기 싫어하는 것 같다.

남편과 나에게는 요즘 세상, 요즘 세대가 조금 낯설다. 철모르고 일찍 결혼해 힘든데도 아이가 좋아 넷이나 낳은 우리는 아이를 갖는 데 왜 그리 선결 조건이 많이 필요한지 잘 모른다. 집에 사람들을 초대해 따뜻한 밥을 대접하는 게 왜 그리 힘든 일이 된 건지도 잘 모른다. 

친정의 가정경제를 맡으셨던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애들만 다 크면 부자 되겠다 싶었는데 모두 졸업하고 나니 더는 돈이 벌리지 않더라고. 네 아이의 엄마인 내 경험으로도 아이들은 자기 먹을 것을 갖고 태어난다는 옛말이 맞는 것 같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을 꽤 오래 거친 우리 세대는 그래도 서로 나눌 줄 알고, 도울 줄도 알았다. 요즘 말로 라떼는 하고 싶지 않지만 사람 사이에 온정이 넘쳤던, 옛 풍습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다.

코로나 팬데믹 

많은 사람이 코로나19 세계 대유행을 겪으며 다시 집밥의 맛을 알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미국에서도 빵 굽는 가정이 늘어 뉴욕같이 큰 도시에서도 슈퍼마켓에서 호밀이나 통밀가루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도 우리 딸이 대학원 재학 중 동네 빵집에서 일하면서 배운 비법을 받아 잉글리시 머핀, 치아바타, 피타, 심지어 베이글까지 집에서 굽는다. 팬데믹 동안 도시를 피해 바닷가 집으로 피난(?) 왔는데 은둔생활에 남는 게 시간이라 이것저것 해보다가 얼추 제빵사가 된 것이다. 전에는 영 자신 없었던 한국 음식도 1년 이상 집에서 해 먹다 보니 솜씨가 그야말로 일취월장했다.

화가 복이 된다더니(Blessing in a disguise) 어려운 상황에서도 얻게 되는 좋은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을 그리워하게 된 것, 사 먹기보다 집에서 해 먹게 된 것, 그냥 건강하기만 하면 감사하다는 것, 당연히 여기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거였다는 것 등, 그동안 잊었던 기본 가치의 소중함을 다시 깨달았다. 

나와 남편은 허구한 날 손님이 끊이지 않던 생활에서 갑자기 둘만 있게 되자 처음에는 모처럼의 휴식이 싫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그리웠다. 그리고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사람들을 자주 초대했는지 상대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나는 미국에 산 기간만 40년이 다 되어간다. 거의 매해 서울을 방문했지만 그래도 외국인에 가깝다. 그래서 그런가, 근래에 서울에서 이해가 잘 안 되는 풍조가 있다. 절친한 친구도 집밥을 먹으러 오라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에 맛있고 저렴한 식당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옛날 우리 어렸을 때처럼 스스럼없이 사람들을 집에 들이는 정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쉽다. 

성경 신명기와 야고보서에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구절이 있는데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말씀이다. 언젠가부터 남편과 나는 우리가 딱히 받은 달란트도 없고 거창하게 선교도 못 하지만, 분명히 우리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염두에 둔 것이 바로 이 말씀이었다. 비록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돕지는 못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면 하고 싶었다. 고아는 아니지만 부모를 떠나 뉴욕에 사는 친인척, 친구의 아이들이 열 명이 넘는다. 자연히 우리가 그들의 보호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뉴욕을 거쳐 간 많은 손님도 우리에게는 나그네였다. 어차피 우리도 본향인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나그네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뉴욕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줄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럴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셨다. 여기저기 거처를 주셔서 따뜻한 잠자리와 맛있는 식사를 제공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너 뭐 하다 왔니?” 하고 물으시면 감히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조금 돌보려고 노력했어요”라는 말은 못 할 것 같다.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서 돌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옹기장이 선교단

우리가 뉴저지 몬트클레어(Montclair)에 살 때 옹기장이 선교단이 우리 교회에서 찬양 집회를 열었다. 1987년에 창단된 옹기장이 선교단은 20대 초반에서 30대 중반의 청년들이 주 멤버다. 이들은 거의 자기 돈을 들여 찬양 순회공연을 한다. 우리는 가끔 교회 집회에 오시는 강사님들 식사 대접을 하곤 하는데, 옹기장이 선교단도 그렇게 만났다. 2010년에 처음 우리 집에서 식사 초대를 한 이후 10년 넘게 인연을 맺어오고 있다. 

이들은 2011년에 다시 미주 동부 투어를 왔는데 남자 넷 여자 넷이라 일단 여자들만 우리 집에 묵고 남자들은 다른 가정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숙소가 떨어져 있으니 연습하기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차로 30분 거리라 시간 낭비도 많았지만, 매번 데려다주고 데려오려니 불편하기도 했다. 그래서 제안한 것이 남자들을 지하실에 침낭을 깔고 재우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여덟 명이 2주 동안 우리 집에서 합숙하게 되었다. 처음엔 불편할 것 같았는데 웬걸, 생각보다 좋은 점이 많았다. 환상적인 화음의 아카펠라 찬양을 늘 라이브로 듣는다는 점, 식사 때마다 받는 축복 기도, 제각기 다른 인생 이야기를 들으며 정을 쌓아가는 일들이 그랬다. 그때 이후 찬양 집회에 올 때마다 우리 집에서 짧을 때는 열흘에서 길게는 2주씩 부대끼며 지내다 보니 상당히 친해졌다. 

옹기장이는 해마다 오는 이들도 한둘 있지만 대개 새로운 대원들이 온다. 그도 그럴 것이, 직업이 있는 청년들이 매해 일을 쉬고 자기 돈을 들여 참여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새 대원들과 여러 날 같이 살면 곧 한 식구처럼 되었다. 같이 지내면서 단원들의 식성도 알게 되어 그들이 좋아하는 메뉴도 빼놓지 않고 준비한다. 아침 식사에는 딸기 스콘을, 저녁에 한 번은 꼭 라쟈냐를 먹여 보낸다. 이렇게 여러 해 만나다 보니 우리가 서울에 가면 그동안 거쳐 간 많은 친구가 한곳에 모인다. 그때는 어떤 동창모임 부럽지 않게 서로 반긴다.

옹기장이 선교단이 2013년에 방문했을 때, 내가 무작정 연결한 브루클린 태버너클교회(Brooklyn Tabernacle) 화요찬양집회에서 찬양하는 기회가 생겼다. 웬만해선 초청받을 수 없다는 그 무대에서 3천 명 관중 앞에 섰을 때 우리 부부는 마치 내 자식들이 무대에 올라간 것처럼 가슴이 두근대고 벅찼다. 옹기장이 선교단은 그날 우레 같은 박수와 앙코르 요청을 받았다. 이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그를 전하겠다는 열정으로 노래하기에 특별한 감동을 준다. 팬데믹 여파로 옹기장이 선교단의 순회공연도 멈췄다. 오래 못 봤는데 모두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 

방송국 프로듀서인 정현 씨 덕에 우리는 서울 방문 때 SNL 녹화방송을 구경할 수 있었다. 처음엔 총각으로 왔다가 이듬해 결혼해서 신혼여행 대신 찬양 집회에 왔던 기현 씨와 지혜 씨는 이제 아이가 셋이다. 여성용 비타민을 싸 들고 나타난 은현 씨, 캐나다로 시집간 소프라노 은혜 씨, 눈앞에서 연애하다 들킨 보현 씨와 한나 씨도 지금은 부부가 됐다. 훈제연어를 좋아하던 윤주 씨는 아직 호주에 사는지 궁금하다. 거기에 매년 빠지지 않고 팀을 이끈 아옹 씨, 왜 코미디언이 되지 않고 일반인으로 사는지 궁금한 남웅 씨까지, 이들이 보고 싶을 땐 유튜브에서 옹기장이의 노래를 들는다. 다행히 브루클린 태버너클교회 공연 영상도 있어서 그때의 감동을 다시 받곤 한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 얻은 게 참 많다. 하나님을 통한 순수한 사랑과 열정에 감동했고 그들의 헌신적인 생활을 보며 우리 삶을 돌아보곤 했다. 참 고마운 젊은이들이다.

나의 가난했던 유학 시절 (Paris그림, 크기 대)

배고프고 가난했던 유학생 시절, 내게도 잠자리를 제공하고 맛있는 것을 먹여준 고마운 분들이 있다. 그래서 나도 특별히 유학생들에게 마음이 쓰이나 보다.

1980년에 파리에 도착해 처음엔 둘째 언니네 잠깐 얹혀살았다. 형부도 가난한 유학생이라 마냥 같이 살 수 없기에 거처를 찾았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물방울 화가 김창열 선생님 댁이었다. 프랑스 분과 결혼하신 선생님께서는 부인의 한국말 교습을 위해 한국 학생을 두셨는데 그 자리를 내가 맡게 되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1시간 정도 한국말을 가르치는 대신 다락방에서 지낼 수 있었다. 

프랑스의 거의 모든 타운하우스가 그렇지만 맨 꼭대기 층은 예전에 하인들이 살던 방이다. 요즘은 주로 독립하고 싶은 틴에이저들 혹은 아기 보는 유모가 살거나, 작업실로 쓰이기도 한다. 선생님 댁은 파리에서 아주 좋은 구역인 6구에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맨 꼭대기 층인 것과 목욕실이 없다는 점만 빼면 나같이 가난한 유학생에게는 정말 좋은 기회였다. 집에는 작은 화장실밖에 없어서 목욕은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 댁에서 해야 했지만 그다지 불편하다는 생각은 안 했다. 뤽상부르(Luxembourg) 공원이 바로 옆에 있어서 산책하기도 좋았고, 학교 가는 교통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사모님은 김창열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한국요리를 참 잘하셨다. 김치도 잘 담그셨는데 김칫소로 당근 같은 잘 넣지 않는 채소를 쓰셨다. 그게 처음엔 좀 낯설었지만 약간 우리 집 이북식 물김치같이 국물이 많고 시원해서 그런대로 맛있었다. 본인도 가끔 김칫국물이 당긴다고 얘기할 만큼 김치를 좋아하셔서 떨어뜨리지 않고 담그셨다. 

그 당시에는 한국 음식 재료를 파는 곳도 없었고, 중국 가게가 아니면 배추 구하기도 힘들었다. 둘째 언니는 배추김치 대신 양배추김치나 빨강무김치를 담그곤 했다. 한국식당이라야 비싸고 별로 맛도 없는 곳 한두 군데뿐이었는데 김치를 더 달라면 돈을 받았다. 그래서 아주 가끔이었지만 사모님의 수업이 끝나고 “밥 먹고 가라”고 권하실 때는 그야말로 생일날 같았다. 완벽한 맛은 아니지만 한국 음식을 먹는 자체만으로 행복했다. 부모님을 떠나 가난한 유학생으로 살 때 누군가 먹여주는 밥 한 끼는 의미가 달랐다.     

파리가 아름다운 도시이기도 했지만 젊을 때 그곳에 있다는 게 큰 행운 같았다. 파리에서는 아주 적은 돈으로도 갈 수 있는 데가 정말 많았다. 한 달 쓸 수 있는 유레일패스가 당시 100달러 정도여서 유럽의 어디나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잠은 유스호스텔에서 잤는데 하루 1~2달러면 잠자고 아침까지 먹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공짜에 가까운 값이었다. 학생증만 있으면 모든 박물관이나 명소를 거의 그냥 들어가던 정말 살기 좋은 시절이었다.

한번은 브라질 친구 엘리사와(Elisa)와 두 주 예정으로 집채만 한 배낭에 침낭과 옷가지를 챙겨 스페인 여행을 떠났다. 우린 미리 촘촘한 일정을 짜진 않았다. 대충 큰 도시만 정하고 중간에 맘 내키는 곳에서 내려 구경하고 다시 떠나기로 했다. 그런 의미에서 기차역 짐 보관소는 우리에게 최적의 시설이었다. 잠도 주로 밤 기차를 타면서 숙박비를 줄였다. 심지어 한번은 기차역 광장에서 침낭을 펴고 잔 적도 있다. 아침이 되니 밤새 이슬이 내려 습하고 추웠지만 우리 같은 학생이 수십 명 널브러져 자기에 위험할 일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딸은 절대 못 시킬 것 같은 낙후한 상황이었지만 그런 여행만이 줄 수 있는 낭만과 추억이 많았다. 더 귀한 건 거기서 얻은 값진 체험이다.

2주 만에 돌아오는 우리는 그야말로 지치고 배고픈 노숙자를 닮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식당에서는 딱 한 번밖에 못 먹었고 주로 카페에서 파는 삶은 달걀이 우리 단백질 보충의 전부였다. 나머지는 고작해야 간단한 샌드위치나 맨 빵으로 때웠다.

(프로방스 별 그림, 크기 대) 

스페인을 떠나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로 들어올 무렵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그곳 대학에서 가르치고 계시던 형부 친구 순기 언니 댁에서 이틀 신세를 지게 되었다. 순기 언니는 나와 거의 띠동갑 위였는데 혼자 살고 계셨다. 집은 시골 헛간을 개조한 것이었는데 눈앞에 세잔의 풍경화에 자주 등장하는 셍뜨빅뚜와르(Sainte-Victoire) 산이 떡하니 들판에 서 있었다. 믿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우리는 판화 작가인 언니의 커다란 아틀리에 위 다락방에서 꿀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언니가 멋진 밀짚모자를 쓰고 동네 빵집에서 바게트를 사 오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밝은 아침 햇살 아래 바구니에서 삐져나올 만큼 기다란 바게트를 들고 오시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언니는 이름 모를 곡식이 잔뜩 들어간 샐러드를 해주셨는데 오래 허기졌던 우리에게는 당연히 꿀맛이었다.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언니네 집 뒤에 있는 노천 샤워였다. 처음에 언니가 거시서 샤워하라고 했을 때는 적잖게 당황했다. 

“한번 해봐. 굉장히 좋을걸?” 

그런데 언니 말이 맞았다. 남프랑스의 뜨거운 태양 아래 셍뜨빅뚜와르 산을 바라보며 한 샤워는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들판 한가운데 담장도 없는 집 마당에서 누가 지나갈까 살짝 불안해하면서 하던 샤워. 스무 살 순수했던 나이라서 더 스릴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훗날 그 추억을 떠올려 나도 바닷가 집에 노천 샤워를 만들었지만 정작 한두 번밖에 해본 적이 없다. 두 손자의 할머니가 된 지금 그 감성이 사라진 때문일까?

정원 가꾸기 (꽃 그림, 크기 대)

언젠가 딸아이가 물었다. 

“엄마는 언제가 제일 행복해?”

행복하다는 건 좀 거창한 표현인지 몰라도,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르니까 그렇게 치면 정원 가꿀 때, 그림 그릴 때 행복한 것 같다. 일단 잡념이 없어져 좋은데 손님 초대로 음식을 하고 집안을 치울 때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굉장히 빨리 간다.

바닷가에 집을 짓고 살기 전, 남편은 정원 일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내가 마당에서 일하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았다. 밖에서 일하는 동안은 끼니때가 되는 것도 모르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마당에서 잡초를 뽑다가 그만 정이 들고 말았다. 워낙 말끔히 치우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잡초를 뽑으면 정원이 깨끗해지니까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나 보다. 아직 나만큼은 잡초와 꽃을 구분하지 못해 가끔 내 어린 화초를 왕창 뽑아 버리는 수도 있지만, 꽤 넓은 마당을 남편 도움 없이 가꾸는 건 엄청나게 힘들 것이다.

아버지가 우리 어릴 때 쓰신 수필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딸들이 나의 뜰에서 튼튼하게 자라서 토양 좋은 다른 밭으로 이식되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정원사 공부를 해야겠다.”

우리도 자식을 기르는 마음으로 7년째 정원 구석구석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고 자라나는 생명을 돌보고 있다. 어느 날, 오래전에 씨 뿌려 놓은 도라지가 꽃을 피운 것을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과 신통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정원 일이 큰 수확이나 결실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다. 그저 그 과정이 즐거운 것이다. 하찮아 보이는 것에서 터 나온 생명이 커가는 것을 보면서, 같은 꽃이라도 내 손으로 키운 꽃에 무한한 애정을 갖게 된다. 어린 왕자의 눈에는 지구에 핀 오천 송이의 장미보다 자기 별의 장미 한 송이가 더 소중했던 것처럼 말이다.

사람과의 관계도 정원을 가꾸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엔 별 의미 없는 사람이었지만 관심을 가지고 세심히 돌보면 결국 특별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식사 초대만 하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을 집에 재운다. 우리의 가족이나 친구뿐 아니라, 자매들의 친구, 조카의 친구들까지도 잘 곳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잠자리를 제공한다. 심지어 우리가 집에 없을 때도 방을 내준다. 경제적 형편이 안 좋은데 호텔비 쓰느니 소박한 방이지만 우리 집에서 재워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다. 어차피 내가 가진 게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나누어 쓰면 좋다고 생각한다.

그간 하도 많은 사람이 자고 가다 보니 머물고 간 사람은 우리를 기억하는데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몇 년 전 파리에 거처를 마련하고 우리가 자주 가게 되니까 막냇동생이 제 친구 윤희 얘기를 했다. 언젠가 우리 집에서 하루 묵었는데 회사 주재원인 남편과 파리에 산다는 것이다. 미안하게도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 우리는 윤희의 초대로 파리 외곽에 있는 윤희네 집을 방문했다. 윤희는 귀여운 개 두 마리와 예쁜 집에 살고 있었는데 음식솜씨가 수준급이었다. 남편을 따라 동남아시아에서도 산 적이 있어서 요리가 다양했다. 그날 우리는 성격 좋고 재밌는 남편 진홍 씨와 정말 즐겁게 보냈다.

윤희네서 돌아오는 내 기분은 마치 오래전에 들어놓고 잊어버린 적금을 탄 것 같았다. 씨를 뿌려 놓고 잊어버렸던 도라지꽃을 발견했던 기쁨과 비슷했다. 씨를 뿌릴 때는 별로 수고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꽃이 피지 않아도 크게 실망하지 않는다. 그렇게 지내다 어느 날 새싹이나 꽃이 핀 것을 발견하면 보화를 얻은 듯 기쁘다. 나는 적은 수고를 했을 뿐인데 수십 배 큰 선물을 받은 것 같다. 윤희네와 우리는 그렇게 서로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 생각지 않게 얻은 귀한 인연이다. 윤희네는 임기를 마치고 이제 서울에서 산다. 팬데믹이 끝나고 서울에 가면 밥이라도 한 끼 사주고 와야겠다. 

나도 반얀나무처럼  (나무 그림, 크기 대)

우연한 기회에 은사 측정 테스트를 해보게 되었다. 은사를 다른 말로 하면 재능과 비슷하다. 교회에서는 달란트라고 부른다. 은사 측정은 사람마다 가지고 태어난 재능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일종의 적성검사와 비슷하다. 100가지 정도 되는 질문에 답을 한 뒤 과연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재능은 무얼까 알아보는 것이다. 

얼마나 정확한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선교의 은사가 나왔다. 선교사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도무지 내 능력 밖의 일인 것 같아 의아했지만 왜 그런 답이 나왔는지 짐작은 간다. 외국어를 좀 쉽게 배우고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살아본 경험이 답에 반영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 가지 않는 의외의 결과가 있었다. 나는 섬김의 은사가 선교의 은사보다 낮은 반면, 남편은 섬김의 은사 점수가 제일 높았다. 어라? 밥은 다 내가 하고 손님 초대 때마다 그에 따른 잡일은 다 내 차지인데? 그런데 찬찬히 생각해보니 알 수 있었다. 섬김이 실제로 해야 하는 행동이라기보다 섬기기를 즐기는 마음이라면, 그건 남편도 결코 나 못지않기 때문이다.

남편은 대책 없이 집을 내주고, 손님이 오면 나보다 더 신경을 쓴다. 그런 게 너무 과하다며 남편에게 한두 번 불평한 적도 있다. 아무것도 없는데 사람마다 밥 먹고 가라고 붙잡아 앉힐 때는 난감할 때도 종종 있었으니까. 그러니 섬김을 은사로 받고 태어난 남편과 결혼한 내가 어쩌겠는가. 이왕 하는 것, 즐겁게 기꺼이 하리라 마음먹었다.

코로나 19가 좀 잠잠해지자 오랜만에 하와이 마우이섬으로 여행을 떠났다. 코로나 청정지역인 하와이는 미국의 다른 주보다 복잡한 절차를 겪어야 갈 수 있다. 불평을 참고 도착한 하와이는 언제나 기막힌 날씨를 선사해서 여러 관문을 거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쉬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어서 리조트에서 하는 요가를 해보기로 했다. 요가 장소가 우산처럼 생긴 커다란 나무 밑이었는데 하와이에 네댓 번 왔지만 처음 보는 나무다. 아름다운 잎이 둥그렇게 퍼졌고 그 아래는 뿌리까지 잔 이파리들이 없어서 마치 우산을 펴놓은 것 같다. 나무 아래는 자연히 풍성한 그늘이 생긴다. 토박이로 보이는 선생님께 물어보니 반얀나무(Banyan Tree)라고 한다. 

하와이는 그늘에만 들어가면 무척 시원해 훌라춤도, 요가도, 필라테스도 이 나무 밑에서 하고 있었다. 새들도 동이 트면 반얀나무 밑에서 쉬다가 해 질 무렵 다 같이 날아간다고 했다. 리조트에서 한 시간 떨어진 라하이나(Lahaina) 공원에 반얀나무가 많다고 해서 가보고 싶었으나 가지 못했다. 새들이 깃들인 나무들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나도 누군가에게 휴식을 줄 수 있는 반얀나무가 되면 참 좋겠다고. 나무가 특별히 하는 일은 없다. 그냥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서 있는 동안은 사람이든, 새든 그 밑에서 쉴 수 있다. 우리도 이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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