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기동의 작은 아씨들

어머니 (어머니 그림, 크기 중)

내가 왜 이렇게 사람 대접하는 걸 좋아하게 되었나 생각하다가 이게 외할머니의 유전자로부터 내려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나는 외할머니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할머니가 되고 보니 그건 무척 슬픈 일이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두 손자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굉장히 슬플 것 같으니 말이다. 

우리 할머니는 손주들을 살갑게 대하지 않으셨다. 남녀차별도 심하셔서 세뱃돈을 주실 때는 공공연히 남자 사촌들에게 더 많이 주셨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늘 할머니를 칭찬하셨다. 내 기억에는 희미하나, 주변의 불쌍한 사람을 많이 도와주셨다는 것이다. “뒷집의 고약한 아주머니가 오래 데리고 있던 가사 도우미의 밀린 월급을 한 푼도 안 주고 맨몸으로 시집보내려 했다. 그걸 아신 할머니께서 당신의 한복감으로 옷을 해주고 새 버선까지 내어주셨다. 허기진 채 배달 온 물장수가 물 한 그릇 부탁하면 밥상까지 차려주셨는데 그야말로 그릇들을 싹싹 비워서 물장수 상을 만들었다.” 뭐 그런 미담들이었는데 할머니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냥 흘려들었다. 

그런데, 그런 할머니를 보고 자라서인지 우리 어머니도 늘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거둬 먹이셨다. 아버지 직업 때문에 많은 사람을 거둬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엄마는 그러셨을 게 틀림없다. 옛말에 욕하면서 닮는다고 하는데 좋은 의미에서 할머니의 유전자가 엄마를 거쳐 내게 온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아기 때 이사가 우리 부모님이 35년 동안 사신 제기동 집은 시장 옆 골목 끝에 있었다. 지금 가봐도 정말 슬플 만큼, 70~80년대쯤에서 거의 한 발자국도 발전하지 않은 낙후된 골목이다. 우리 집은 동네 사람 누구나 손을 넣어 빗장을 풀 수 있는 낮은 나무 대문 집이었다. 그나마 낮에는 빗장이 잠겨 있지 않아서 사람들은 밤낮없이 자기 집처럼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꼬질꼬질했던 골목엔 개똥이 널려 있었고 늘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들렸다. 내 생애의 가장 정겹고 따뜻한 추억이 그 골목에 있다.  

어머니는 본래 살던 작은 집 자리에 새집을 지었다. 동생들이 태어나고, 객식구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주먹구구로 설계한 새집은 방만 많아서 약간 여관 같았다. 부모님과 우리 여섯 자매, 사촌 언니와 외할머니까지 열 명이 기본 식구였고, 가사 도우미들과 상주하는 객식구 두셋 등 최소 열다섯 명 정도가 함께 살았다. 물론 사정에 따라 또 다른 사촌들, 우리 자매들의 친구들까지 함께 살다 가기도 했다. 오죽하면 큰언니가 처음 집 떠나 부모님께 보낸 편지에, 우리도 이젠 식구끼리 한 끼라도 먹자고 썼을까. 그래서 어머니는 처음으로 부엌 한쪽에 식구들만 앉을 수 있는 식탁을 들여놓으셨다. 그게 내가 열두어 살쯤 되었을 때인가보다. 

사촌 언니는 어머니가 집안 사정으로 거둘 수밖에 없게 된 친정 조카다. 언니는 열두 살 때 우리 집에 와서 대학을 마치고 시집갈 때까지 우리와 자매로 살았다. 내가 결혼해 살아보니 처조카를 폭넓게 품어주신 우리 아버지가 정말 좋은 분이었구나 싶다. 

새집을 짓기 전에는 방이 두 개밖에 없어서 우리는 작은 방에서 마치 꽁치 통조림 속의 꽁치같이 쪼르르 붙어서 잤지만 나는 그런 게 다 좋았다. 커다란 양푼에 한가득 밥을 비벼 숟가락을 들고 경쟁하듯 먹었던 기억, 불 끄고 누워 언니 동생들이랑 노닥거리던 것, 밤새 안 자고 떠들다가 엄마한테 혼나던 일. 결혼할 때까지 한 번도 독방을 써보지 못했지만 서운한 적이 없었다. 식구들이 몸을 부딪치며 살았던 그때가 더없이 행복했다. 

어린 시절 추억 중에는 어머니가 사람들을 거둬 먹이시던 풍경이 참 많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엄마의 인사는 늘 식사했냐는 것이었고, 하루에도 여러 차례 밥상이 차려졌다. 하루도 우리 식구끼리 밥을 먹은 적이 없었다고 할 만큼 객식구가 많았다.

설날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큰 잔치가 벌어졌다. 우리 집에서 살다 간 젊은이들이 세배한다며 돌아오는 날이다. 요즘 말로 하면 인턴, 즉 정치 지망생들이다. 우리가 아저씨라고 불렀던 이분들은 대개 아버지의 학교 후배였는데 나중에 국회의원이 된 분도 여럿 있다. 공식적으로는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으레 음식을 준비하셨고, 명절에 우리 집에서 밥 먹는 게 당연하다는 듯, 인턴들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하루 종일 들이닥쳤다. 부엌에선 계속 치지직, 전 부치는 소리가 들렸다. 인턴들이 쓰는 두 방의 미닫이를 열고 상을 차리면 사람들이 미어지게 앉아 떠들썩하게 식사를 했다. 

이런 날엔 꼭 사람들이 짓궂게 아버지께 노래를 청했다. 노래 잘하기로 단연 정계에서 유명하셨던 아버지와 수줍어하시는 엄마가 함께 일어서서 노래 부르시던 모습, 박수 소리와 웃음소리, 현관 밖까지 흐트러진 수십 켤레의 정겨운 구두짝들. 꽁꽁 어는 정월이었지만 내 기억 속의 장면은 봄밤처럼 훈훈하다. 

한 달에 쌀 한 가마 넘게 먹었다는 어머니 말씀은 전혀 과장된 게 아니었다. 인턴들 말고도 이런저런 이유로 손님이 많이 드나들었는데 한창 배고플 나이의 장정들이니 얼마나 많이 먹었겠는가. 어쩌면 반찬이 없어서 밥을 더 많이 먹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집을 거쳐 간 아저씨들이 훗날 엄마께 식사 대접을 하곤 했는데 장난기가 발동하면 이렇게 엄마를 놀리곤 했다. 

“옛날에 하도 풀만 주셔서 밥상에서 메뚜기가 뛰놀았어요.”

그때마다 엄마가 대답하셨다.

“그래, 그건 맞아. 그런데 우리 애들은 고기반찬 해주던가?”

그러면 모두들 “그건 아니었죠” 했다.

사실이 그랬다. 하도 많은 사람이 먹어야 하니 우리 집 반찬은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우리 자매들의 도시락 반찬도 친구들에 비하면 창피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식구건 아니건 반찬 차별 같은 건 하지 않으셨다. 나 역시 수십 년 만에 만난 동네 배꼽 친구가 우리 집 밥상에 김치랑 콩나물밖에 없어서 내가 불쌍했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도 아주 가끔은 고기와 생선도 먹었던 것 같은데….   

이랬던 엄마를 생각하면 내가 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음식 대접을 한다 해도 엄마하고는 비교조차 불가능하다. 언젠가 우리 집에 다니러 오신 엄마가 손님이 자주 오는 것을 보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금이 좋은 때다. 그때는 몰랐는데 집안에 사람이 붐빌 때가 정말 좋은 때였어. 나이 들고 힘없어지니까 사람들 발길이 끊어지더라. 지금을 감사히 여기고 열심히 해라.”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벌써 3년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어머니가 계셨다는 게 정말 자랑스럽다. 살아계실 때는 왜 엄마가 내 엄마여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지 못했을까? 엄마가 내게 좋은 스승이었다고 말씀드리지 못했을까? 그러면 굉장히 좋아하셨을 텐데…. 

거룩한 부담 

20대 초반에 무일푼으로 만나 딸 여섯을 키우신 우리 부모님은 당시 사정으로 보면 그리 특별할 것은 없을지 모른다. 다들 어려운 세상에 살았으니까. 그런데 내가 살면서 더욱 부모님을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분들이 보여주신 사람에 대한 존중 때문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가사 도우미(그때는 식모라고 불렀다)가 흔했다. 우리같이 식구 많고 살림이 큰 집에는 보통 두세 명씩 있었다. 집안일을 맡은 아주머니와 잔심부름하는 나이 어린 식모가 꼭 있었는데 워낙 가난하던 시절이라 먹는 입 하나 덜자고 아이를 남의 집에 보내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고등학생쯤 되니 때론 나보다 나이 어린 식모도 있었다.  

어머니는 새로 식모 언니가 오면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 언니는 너희들 시중들라고 온 거 아니다. 너희 방은 너희가 치우고 언니 말 잘 들어야 한다. 너희가 저 언니와 다른 건 그저 부모 잘 만난 것 뿐이다.”

드물게 물건이 없어져도 잘못 간수한 잘못이라면서 우리를 나무라셨다. 너무 어린 식모가 왔을 땐 일 시키기 가엾다고 기술학원에 보내신 적도 있고, 한글을 모르면 배우게 하셨다. 추석이나 크리스마스 땐 보너스도 주시고, 우리 집에 오래 있다 떠나는 분들에게는 퇴직금처럼 목돈도 주어 보내셨다. 

한번은 아기 못 낳는다고 시어머니에게 쫓겨난 아주머니가 도우미로 오셨다. 그 사정을 듣고 어머니는 동네에 방을 얻어주고 시골에 있는 남편을 불러 같이 살게 하셨다. 그리고 남편을 한국전력 검침원으로 취직시켜 주셨다. 그분들은 현경이라는 예쁜 딸을 낳았다. 

우리 집 앞 고려대학교 입학시험이 있는 날에는 아버지의 고교 후배 수험생들이 수십 명씩 점심을 먹고 갔다. 그날엔 동네 음식점이 모두 만원이라는 점을 감안해 어머니가 점심상을 차렸기 때문이다. 뜨끈한 국이랑 밥을 먹고, 나갈 때는 사과 반쪽짜리를 하나씩 거머쥐고 수험장으로 향했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어느 해, 그 남학생들 때문에 살짝 가슴이 뛰던 기억도 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게 있다. 어느 날 우리 집 옆, 제기시장에 서커스단이 왔다. 며칠 동안 공연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서커스단원들을 데려다가 밥을 먹이셨다. 어찌나 잘 먹고 갔던지 그분들이 떠난 뒤에 불쌍하다며 혀를 차시던 생각이 난다. 아무튼, 어머니는 주위에 기댈 곳 없고 비빌 언덕 없는 사람들을 참 많이도 거두셨다. 내가 뉴저지에 제법 큰집으로 이사 간 후에는 이런 말씀도 하셨다. 

“이렇게 좋은 집에서 너희 식구만 호의호식하면 안 된다.”

그땐 그냥 흘려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에 새기게 해주셨나 보다. 그야말로 거룩한 부담감이라고 해야 하나.

제기동의 작은 아씨들 (자매들 그림, 크기 중)

사람들은 내가 여섯 자매 중 넷째라면 일단 놀란다. 요즘은 주로 재미있겠다면서 부러워하는 눈치긴 하지만, 우리 어머니 세대에는 딸만 낳으면 죄인처럼 느낄 때였다. 가족계획이란 말도 없어서 아들 낳을 때까지 계속 낳는 사람도 많았다. 우리 엄마는 훗날, 딸 여섯 낳는 게 32만분의 1 확률이니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씁쓸한 말씀도 하셨다. 

아버지는 평양 근교 용강 군에서 태어나셨는데, 초등학교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을 만큼 유복하게 자라셨다고 한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 때 서울에 유학 와 공부하시던 아버지는 대학에 갈 때쯤 38선이 막히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혈혈단신 가난한 고학생이 되셨다. 친족이 없는 아버지는 아이를 많이 갖고 싶어 하셨는데, 줄줄이 딸들이 태어나도 서운한 내색 없이 기뻐하셨다고 한다. 내가 그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가 우리를 기르면서 보여주신 특별한 사랑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어머니는 보통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자식 교육이 남달랐던 부모님 덕에 그 옛날에 대학교육까지 받으셨다. 외할아버지께서 자긍심 높게 길러주셔서 엄마는 자신이 노력하면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믿던 분이었다. 그래서 딸을 셋 낳기까지는 꿋꿋하게 버티셨는데 나를 낳자 엄마도 당시 세상을 지배하던 가치관 앞에 무너지셨다. 

나는 엄마가 나를 낳고 우셨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더 슬펐다. 내 잘못도 아닌데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태어났다는 게 억울했다. 엄마를 울렸다는 게 속상했다. 아들딸 관념이 완전히 반전된 요즘, 젊은이들이 듣기에는 고려 시대 이야기 같을 것이다. 사실 나중엔 우리 어머니도 딸 덕에 비행기 타고 여행 다니는, 어깨가 한껏 올라간 엄마로 사시면서 아들만 가진 부모들의 부러움을 사셨으니 말이다. 

우리 자매는 정치인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어려서부터 험난한 정변을 겪으며 살았다. 언니들은 5.16 군사쿠데타가 나자 군인들이 군홧발로 우리 집에 들이닥쳐 휘젓고 가는 공포스러운 장면을 목격했다. 대문 앞은 중앙정보부 요원이 감시했고, 우리 집 전화는 당연히 도청당했다. 편지도 검열한 후 배달되는 게 많았다. 아버지는 여러 차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문초당하고 매를 맞으셨다. 전두환 때는 보안사에 잡혀가 52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셨다. 발가벗겨놓고 무릎을 꿇린 채 심문하고, 꿇린 무릎을 헌병 세 명이 돌아가며 군홧발로 짓밟았다. 침대 각목이 몇 개씩 부러지도록 때려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셨다. 아버지는 그 스트레스 때문에 얼마 후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30년 군사정권 아래서 당한 기억들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훗날 아버지가 큰 수술 후 깨어나서 하신 첫마디가 “여기가 중앙정보부요?”였을까. 

그렇게, 한창 자라는 아이들이 전혀 경험할 필요 없는 것을 우리는 일상으로 받아들이면서 아이답지 않은 철도 들었던 것 같다. 큰언니의 증언에 의하면 아버지는 박정희 때 가족도 모르게 마포 형무소에 수감되셨다가 풀려난 후, 경기도 운길산에 있는 수종사로 피신해 3개월을 숨어 계셨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옷가지와 먹을 것을 가져다드리느라 집에 안 계실 때가 있었는데 그때 겨우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큰언니는 ‘내가 동생들을 지켜야 한다’는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어찌 보면 살벌할 수 있는 환경에서도 우리가 잘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낭만적인 아버지 덕이 크다. 어쩌다 정치에 입문하셨는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본래 문학청년이었고 음악을 몹시 사랑하는 분이었다. 그래서 큰언니가 말을 배우자 곧 노래와 시를 가르치셨다. 당시 세 살밖에 안 된 큰언니는 소월 시도 곧잘 외웠는데 아버지는 언니를 데리고 다니며 친구들에게 자랑하셨다고 한다. 훗날 많이 바빠지셨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우리의 낭만 교사였다. 

아버지는 그 옛날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열린 분이기도 했다. 부모님이 셋집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성북구 삼선동에 있는 열두 평짜리 한옥의 주인이 되셨을 때 아버지는 문패에 두 분의 성함을 나란히 새기셨다. 그때가 1956년이었는데 우리나라 문패 역사에서 남녀의 이름이 평등하게 새겨진 최초의 사례였을 것 같다. 

아버지는 바쁘신 중에도 틈틈이 우리를 산으로 들로 데리고 다니셨다. 미니스커트가 경찰의 단속대상이던 시절에 손수 딸들의 미니스커트를 사다 주셨고, 대학에 들어가면 포장마차부터 시작해서 술집 순례도 해주셨다. 예전에는 딸들의 귀가 시간을 통제하기 위해 ‘통행금지시간’을 둔 집이 많았는데, 우리는 딸이 여섯이나 되는데도 그런 게 없었다. 아버지가 자식은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통금이 없는데도 우리 자매들은 별로 늦게 다니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들 ‘집순이’라고 할 만큼 집을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우리 여섯 자매는 그냥 매일매일 재밌고 행복했다. 드물게 작은 다툼도 있었지만 ‘싸움’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은 거의 없었다. 어머니도 두고두고 우리가 다투지 않고 큰 것을 대견해 하셨다. 한두 번 오빠나 남동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보았으나 결론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들끼리여서 단합도 잘 되고, 알콩달콩 지낸다고 굳건히 믿게 된다. 

누구도 못 말리는 우리 자매들의 우애는 좋은 환경 때문에 생긴 건 아닌 것 같다. 평생 바쁘셨던 부모님 때문에 알아서 서로 의지하고 챙기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깊어진 것 같다. 새 옷 보다 물려 입는 옷이 많았고, 뭐든 나눠 가져야 했다. 바람 잘 날 없는 정변을 함께 겪고, 혼자 되신 엄마의 노후를 같이 책임지면서 더욱 끈끈한 팀이 된 것 같다. 만일 우리 집에 재산이 많았다면 우리도 남들처럼 돈을 놓고 추악한 싸움을 벌였을까? 어쨌거나 이거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 자매의 우애는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제 위의 두 언니가 70대가 되고, 막내도 오십 후반에 들어섰을 만큼 세월이 흘렀다. 제기동의 작은 아씨들이 긴 세월을 건너 아줌마, 할머니가 되었다. 우리 자매가 안정기에 접어든 지는 얼마 안 된다. 어느 가정이나 그렇듯 우리에게도 힘든 일이 적지 않았다. 그 힘든 시간 역시 우리는 마음으로, 물질로 서로 도우며 이겨냈다. 그러면서 서로 뭉치면 천하무적이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터득했다.    

우리 집의 동화 같은 크리스마스

우리 친정에는 특별한 전통이 있다. 1년 중 크리스마스를 가장 큰 명절로 지킨다. 태어나자 유아세례를 받고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자라신 아버지가 크리스마스를 대단하게 준비하고 지키셨기 때문이다. 큰언니가 네 살 때, 부모님은 단칸방에 사셨는데 그때도 언니를 위해 그 작은 방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셨다고 한다. 부모님이 젊으셨을 때는 두 분이 성탄 노래를 부르며 동네를 도신 적도 있다고 한다. 가히 한국의 크리스마스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이다. 

우리가 커가면서 12월 한 달은 내내 축제 분위기였다. 우리 집 마당에는 키 큰 전나무가 있었는데 12월 중순쯤이면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했다. 반짝이는 은금색 줄과 색색의 전구를 두르고 과자와 장난감을 담은 양말을 걸어놓았다. 그때는 가정집에 크리스마스트리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때라 담 밖으로 드러난 우리 집 트리 불빛에 동네 사람들도 마음이 설렜을 것 같다. 

산타할아버지 존재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비밀이 지켜졌는데 나는 4학년 때쯤 우연히 뒷방에서 선물을 싸시던 엄마를 잘못(?) 목격한 탓에 알게 되었다. 순진했던 셋째 언니는 학교에서 산타할아버지가 없다는 친구와 논쟁을 하고 나서 밤을 새워서라도 진실을 밝히려 했다. 결국 새벽에 잠이 들어 그해에도 산타할아버지는 오시고 말았다. 

언니들이 크고 나서는 빵과 과자를 굽는 일이 며칠간 계속되었는데 그 향기로운 냄새가 우리를 행복하게 했다. 마침 집에 벽난로가 있어서 우리 집 성탄 분위기는 제법 로맨틱했다. 정치인보다는 예술가가 더 어울렸을 낭만적인 아버지는 집을 증축할 때 어머니께 딱 하나, 벽난로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하셨다. 당시에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벽난로를 제대로 만들 사람이 없어서 그리 볼품은 없었지만, 장작을 때면 분위기는 그럴싸했다. 아버지는 벽난로 재를 일부러 흐트러뜨려 마치 산타할아버지가 굴뚝으로 드나든 것처럼 꾸미셨다. 가끔 떼를 쓰는 동생에게는 “산타할아버지가 너 요즘 말 잘 듣냐고 물어보시더라”고 하시는 바람에 동생은 선물을 못 받을까 봐 맘을 졸였다. 한번은 막내가 선물로 공주 드레스를 원했는데 그때만 해도 동생이 그려서 보여준 3단 드레스를 팔지 않아 엄마가 동네 허름한 양장점에 주문하셨던 기억도 있다.

성탄절 이브에는 온 식구가 벽난로 앞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렀다. 성악을 전공하고 싶으셨을 정도로 미성이었던 아버지와 아기 때부터 재능을 보여 성악을 전공한 셋째 언니, 피아노 신동으로 불렸던 막내, 무조건 노래하기 좋아하는 나머지 딸들, 아무튼 엄마만 유일하게 음악과 좀 거리가 멀었지만, 우리는 어려서부터 모이면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무슨 노래든 화음을 넣어 부르는 버릇이 있었는데 가족 숫자가 많으니 꽤 멋있게 들렸다. 사실은 함께 노래하는 게 좋아서 그렇게 들렸을 것이다. 

결혼 후 자기들만의 크리스마스를 보내지만 우리 자매는 모두 그때를 그리워한다. 그래서 가끔 두세 가족이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보지만 어쩐 일인지 그 옛날 우리 집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되살아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의 중심이었던 아버지가 안 계셔서 그런 것 같다. 

우리의 크리스마스 추억에는 엉뚱한 사건이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나이 들고 보니 옛일 중에는 진짜로 일어난 일이 아닌,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 아닌가 착각하게 되는 기억도 있는데 이게 그 경우이다. 

어느 해였던가, 둘째 언니가 대학생이었으니 6년 아래인 나는 중학생이었던 것 같다. 워낙 좀 엉뚱한 데가 있는 둘째 언니가 갑자기 우리를 모아놓고, 크리스마스 선물 받는 걸 상상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산타할아버지가 되어 보자고 제안했다. 그 당시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우리는, 특히나 같이 있을 때는 소설 <작은 아씨들>의 자매들처럼 용기가 넘치는지라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선물을 우리 용돈을 거둬 샀는지, 부모님 도움을 받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우리는 장난감과 과자를 꽤 많이 사서 알록달록한 종이에 예쁘게 포장했다. 그 당시만 해도 서울 곳곳에 꼬방동네가 많았는데 우리 동네 개천 주변에도 천막집이 늘어서 있었다. 막상 가보니 선물을 전하는 일이 조금 난감했다. 그런데 금방 모여든 아이들 때문에 순식간에 나누어주고 도망치듯 돌아왔다. 또, 그때였는지 다른 때였는지, 어느 집 앞에 몰래 선물을 놓아두고 누군가 나와서 가져갈 때까지 멀리서 숨죽이고 지켜보았던 기억도 있다.

남편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내가 바로 그때 선물 받은 애 중에 하나잖아”라며 놀린다. 물론 농담이었으나 뒤늦게 그 선물을 받은 아이들이 어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떤 기분이었을까? 누군가에게 믿기지 않는 미스터리를 남기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혹시라도 마음에 상처를 주지는 않았을까 걱정도 된다. 그때 우리는 정말 순수했으나 그 아이들의 삶을 살아보지 않은 우리가 그들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어쨌거나, 이런 아름다운 어린 시절을 갖게 해주신 부모님이 참 감사하다. 사람들은 겉으로만 보고 우리가 유복하게 자랐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30년 군사독재체제에서 올곧게 야당 정치인으로만 사신 아버지, 바른 정치인이 되려면 청렴결백해야 한다며 이런저런 일을 하시며 가정경제를 책임지신 어머니 사이에서 우리는 보통 가정에서 누리는 것 이상의 물질적 혜택은 받지 못했다. 그러나 정서적으로는 그 시대에는 받기 힘든 풍족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유산 

온 가족이 다 모이는 때는 주로 결혼식이나 장례식이다. 우리 같이 자매가 많고 집집이 아이들을 평균 셋 정도 낳은 경우는 결혼식도 만만찮다. 어릴 때는 장례식장에서 왜 그렇게들 먹고 마시는지 이유를 몰랐다. 그런데 상주가 되어서 알게 됐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떠들썩한 일상이 슬픔에 찬 상주들에게 한편 위안이 된다는 것을.

친정어머니는 3년 전, 93세 초봄에 돌아가셨다. 서울에 계셨기 때문에 외국에 사는 우리가 시간 맞추기 어려웠다. 엄마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얘기를 듣고, 정신이 좋으실 때 가봐야 할 것 같아 1월에 혼자 엄마를 뵈러 왔었다. 2월에는 주말을 넘기기 힘드실 것 같다는 소식에 남편과 다시 서울에 갔다. 그런데 병세가 호전되셨다. 마냥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 다시 돌아왔는데 열흘 만에 소천하셨다. 소식을 듣자마자 떠났지만 결국 장례식 이틀째에 서울에 도착했다.

우리 여섯 자매 중 밑의 넷은 미국에 산다. 다행히 큰언니, 작은언니가 한국에 살아서 모든 장례 일정을 맡아주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서너 달 고통받으셨지만 비교적 편안히 천국에 가신 것이 위안이 되었다. 장례식을 마친 후 며칠 동안 우리 자매들은 정말 화기애애하게 지냈다. 다 같이 모이기 쉽지 않은데 오랜만에 함께 지내며 엄마를 추억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회계를 맡은 큰언니가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엄마가 남기신 유산을 나누게 되었다고. 웬 유산? 꿈에도 생각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10여 년 전부터 우리 여섯은 돈을 모아 어머니의 생활비를 드리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도 우리가 유산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알고 보니 우리가 보내드린 생활비를 아껴 남겨두신 것이다. 우리는 1천여만 원씩을 유산으로 받았다. 외화 통장에도 달러가 좀 있었는데 엄마가 미국에 오실 때마다 딸들에게 받으신 용돈을 저축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 돈에 조금 보태 손자녀 열여섯 명에게 할머니 유산이라며 300달러씩 나눠줬다.

모두 나누고 남은 350만 원은 그해 가을 여섯 자매만의 4박 5일 여행 비용으로 썼다. 여행 내내, 우리는 식당에 갈 때마다 “이것도 엄마가 사시는 거야” 하며 농담을 했다. 큰언니는 우리가 부모님의 재산이 없어서 이렇게 사이가 좋다는 씁쓸한 농담을 한다. 그것도 일견 맞지만, 우리가 평생 우애 있게 살도록 편애하지 않고 키워주신 부모님 덕이 아닐까 생각한다.

비록 큰돈은 물려받지 못했지만, 부모님이 주신 정말 값진 유산이 있다. 언제나 주위 사람을 돌보고 나누어주시던 정이다. 부모님을 생각하며 우리도 흉내를 좀 내보지만, 부모님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  

자매들의 음식솜씨 

우리 집 여섯 자매 중 몇은 음식솜씨가 뛰어나다. 나는 중간 정도밖에 안 돼서 명함을 못 내민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해 먹으면 바로 자매 단톡방에 생생한 사진과 요리법을 올리는데 가끔 놀랄 때도 있다. 

워낙 음식 만들기에 관심이 있어서 결혼 전에 요리를 배우러 다닌 셋째 언니는 식사는 꼭 집에서 하시는 형부와 평생 산 덕에 아무거나 척척 해내는 재주가 있다. 언니는 한국 사람이 드문 뉴욕 북부에서 조카 첫돌을 맞았는데 돌상에 직접 수수 경단을 만들어 올렸을 정도다. 이 

언니는 요즘 제주도에 집을 짓고 미국과 제주도를 오가며 살고 있는데 사람 초대도 많이 하고 양쪽 집이 비어 있을 땐 집도 잘 빌려준다. 

조각가인 유학생 남편을 따라 파리에서 산 둘째 언니는 유명한 요리학교 꼬르동 블루(Le Cordon Bleu)에 가는 게 꿈이었다. 비록 학비가 없어서 못 갔지만, 훗날 나에게 손으로 적은 보라색 요리 노트를 물려주었다. 언니는 마흔이 넘어 갤러리 카페를 열었다. 그 나이에 카페를 시작하는 게 두렵다고 했지만, 나는 누구나 잘하는 걸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응원해주었다. 음식솜씨도 있고 손님 대접에도 타고난지라 카페는 크게 성공했다. 언니는 신혼여행 때 처음 본 유채밭에 반해 20년 전에 제주 도민이 되었는데, 서귀포에서 ‘봄’이라는 이름의 미술관과 갤러리 카페가 있는 멋진 숙소를 운영한다. 언니네 숙소는 맛있는 아침이 유명한데 우리 친정의 문화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내 집에서 묵은 손님에겐 꼭 맛있는 아침을 대접해야 하니까.

내 바로 아래 동생은 고등학교 때 깍두기를 담갔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있다. 거기에 먹는 것을 최고의 낙으로 치는 남편과 결혼한 탓에 한식, 양식 모두 수준급이다. 시외숙모께 배웠다는 동생의 치즈 케이크와 초콜릿 케이크는 유명 제과점 것보다 훨씬 맛있다. 깍두기 담갔던 게 전설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막냇동생은 우리끼리 붙인 별명이 한국의 마사 스튜어트(Martha Stewart)다. 본업이 피아니스트인데 못 하는 게 없다. 특히 음식을 할 땐 연구와 실험을 거쳐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나의 거의 모든 요리법은 동생이 임상(?)실험을 거쳐 엄선한 것이다. 우리 집 손님 아침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딸기 스콘도 막내에게 받은 것이다. 

본래 체력이 좀 부실한 큰언니는 막내보다 열여섯 살 위로 벌써 일흔이 넘었다. 언니는 스스로 자신이 음식 하는 것을 싫어한다면서도 손님을 초대한다. 손님을 치르면 며칠 힘들어하면서도 아직도 집에서 손님 대접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우리 아이들이 간혹 서울에 가면 큰언니네 묵는데 손님의 취향을 배려한 아침을 차려주려고 그 전날 메뉴를 선택하게 한다.

그래서 어쩌다 여섯 자매가 모이면 부엌은 전문 요리사들이 모이기라도 한 듯 활기차다. 한식은 둘째와 셋째 언니, 양식은 다섯째와 막내의 주 종목이다. 나와 큰언니는 손 놓고 구경만 해도 기막힌 상이 차려진다. 

2년 전 크리스마스 때 다섯째와 막냇동생네 식구들까지 다 함께 바닷가 집에서 보냈다. 사나흘 동안 스무 명 가까운 식구들을 먹일 수 있었던 것은 두 동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음식도 맛있었지만 그때 만든 크리스마스 전통 케이크는 정말 제과점 것보다 멋졌다. 통나무 모양의 케이크 위에 얹은 버섯과 솔방울 같은 장식들은 손으로 만든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덕분에 어린 시절 친정에서 보내던 눈물 나게 아름다운 성탄절을 오랜만에 다시 맞은 기분이었다. 

자매들의 교복 (자매 그림, 크기 중)

우리 자매는 키가 큰 편이다. 키 178cm로 옛날 분치고는 무척 크셨던 아버지 덕이다. 나도 학교 다닐 때는 반에서 한두 째 갈 정도로 컸지만, 자매들 사이에선 중간에 속한다. 163cm로 제일 작았던 셋째 언니에게는 “왜 이렇게 쬐끄매”라며 놀리곤 했다.  

키 차이는 좀 있지만, 우리 자매는 옷 입는 치수가 같고 취향도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른바 ‘교복’이라고 부르는 옷을 여러 벌 갖고 있다. 우리 중 누군가 예쁜 옷을 보면 별로 비싸지 않은 경우 하나씩 사서 돌리기 때문이다. 한번은 큰언니가 얌전한 까만 원피스를 하나씩 사주었는데, 다 같이 그 옷을 입으면 장례식 치르는 줄 알겠다며 웃었던 기억이 있다. 발 크기도 여섯 중 넷은 같아서 예쁜 신을 보면 서로 사주기도 한다. 미국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미국으로 자매들 집을 방문할 때는 신발을 안 챙겨도 걱정이 없다. 현지 조달이 가능하니까.  

우리는 또 세 번 예쁘다고 말하면 줘야 한다는 이상한 법도 있다. 법을 정한 게 아니라 언니나 동생이 입고 있는 옷을 예쁘다고 하면 맘이 약해져서 벗어주니까 생긴 말이다. 어릴 때는 동생이 언니 걸 물려 입었지만, 지금은 언니도 동생 걸 받아 입는다. 인심 후하기로 소문난 셋째 언니는 만날 때마다 자매들에게 옷 한 벌씩 물려주기로 유명하다. 핸드백도 예외는 아니다. 서로 사주고 받다 보니 한자리에 같은 백을 들고 갈 때도 있다. 한번은 큰언니가 둘째 언니 집에 갔다가 둘째 언니 가방이 자기 것인 줄 알고 바꿔 메고 나간 재밌는 사건도 있었다.

큰언니와 막냇동생은 열여섯 나이 차이에도 친구처럼 지낸다. 아니, 다들 그냥 친구 같다. 다행히 아직은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언니들이 씩씩하게 앞서가니까 뒤따라가는 우리에게는 큰 위안이 된다. 앞으로 3년 뒤, 6년 뒤, 9년 뒤 나의 모델인 언니들이 아직은 내 눈에 참 예쁘다.

자매들의 여행

자랄 때 제일 많이 듣던 엄마의 잔소리가 “제발 밤늦게까지 모여 있지 말고 제 방에 가서 자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오죽 붙어 지냈으면 그러셨을까. 그 버릇은 각자 가정을 가지고도 끊지 못해서 우리는 지금도 호시탐탐 함께 모일 구실을 찾는다. 

20여 년 전 막냇동생이 하와이에 살 때 여섯 자매의 가족이 함께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2세들까지 각지에서 온 스물다섯 명이 하와이의 콘도에서 왁자지껄 일주일을 보냈다. 식구가 많으니 한 번 모이는 데만 30분이 걸렸다. 우리는 매번 인원 점검을 했는데, 한번은 조카 하나가 차에 타지 않았다고 난리가 났다. 영화 <나 홀로 집에>를 떠올리는 짧은 소동 후, 결국 조카가 다른 차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안도했다.

그러고 2년 뒤 우리는 둘째 언니가 사는 제주도에서 다시 모였다. 이번에는 식구가 늘어 스물여덟 명이었다. 둘째 언니는 하와이에서의 경험을 떠올려 아예 관광버스를 대여했다. 처음에 버스 앞 유리에 둘째 언니 이름을 넣어 ‘아무개 가족’이라고 써 붙인 것을 보았을 때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버스 내부는 보라색에 금색 레이스를 단 촌스런 커튼이 사면에 달려서 또 웃었다. 버스에 탈 때마다 아무개 가족이란 사인이 웃겼지만, 그게 또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우리의 끈끈했던 성장기, 따뜻했던 제기동 집이 거기 담겼기 때문이다.

식구가 많아서인지 우리 가족이 가는 곳에는 꼭 웃기는 사건은 일어난다. 서귀포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다음 행선지로 향하고 있는데 갑자기 막냇동생이 외쳤다. 

“어머, 우리 남편 어디 있어?”

하와이 사건 이후 아이들 머릿수만 꼼꼼히 점검했지 어른까지 챙길 생각은 안 했는데 이번엔 어른이 실종된 거다. 스물여덟 명이 함께 움직이다 보니 제부가 화장실에 간 것을 모르고 출발한 게 사단이었다. 당시는 미국 휴대전화를 한국에서 사용하기 힘들 때라 제부는 전화도 못 하고 식당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간에 동생은 당연히 어느 언니와 신나게 떠들며 남편은 잊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집집이 아이들이 따라다녔는데 그새 2세들이 결혼해 식구가 열여섯 명 늘었다. 버스 한 대에 다 탈 수 없게 된 지 이미 오래인데, 아기들이 계속 태어나고 있으니 이런 대가족 여행은 쉽지 않게 생겼다.  

살아갈수록 자식 생각하지 말고 우리끼리 재미있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요즘은 자매들끼리의 여행이 더 잦아졌다. 송 자매들이 모이면 그 기에 눌린다며 툴툴거리는 남편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오는 우리의 우애는 부러워하는 눈치다. 그런데 송 자매들에게 장가든 남편들 역시 어느새 우리에게 물들었는지 형제처럼 친하다. 하기야 같이 지낸 세월이 얼만가. 

동서들끼리 형제처럼 지내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어머니가 생전에 “우리 사위들은 모두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것 같다”고 말씀하셨을 정도로 성향이 비슷하다. 특히 술꾼은 한 사람도 없고 모두 ‘집돌이’라는 점이 그렇다. 결국, 남편들까지 한통속이라 자매들의 여행엔 남편들이 따라붙는다. 때론 자매끼리만 가고 싶은데 말이다. 

그런데 인생이 참 묘하다. 자식들에게서 해방되어 여생을 누리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이젠 건강이 발목을 잡는다. 자매들 여행의 꿈은 찬란한데 한 사람, 두 사람 아픈 곳이 생긴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는데 왜 정점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 걸까? 이게 인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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