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하셨어요?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서로 길에서 만나면 “식사하셨어요?” 하는 게 인사를 대신하던 말이었다. 밥 한 끼 제때 먹는 것도 어려운 시대여서 그랬던 걸까? 아직도 한국의 1970년대를 살고 있는 남편도 우리 집에 들른 사람에게 그렇게 묻는다.
“식사하셨어요?”
“밥 먹었니?”
한국 사람에겐 한국말로, 미국 사람에겐 영어로 물어본다.
“Did you eat?”
그런 인사 문화가 없는 미국 사람에겐 의아한 질문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남편은 식사시간 1시간 전후에 만나는 경우엔 100% 물어본다. 대개는 안 먹었어도 먹었다고 하는 경우가 많지만, 눈치가 살짝 없으면 안 먹었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남편은 내가 당연히 음식을 내놓을 거라고 여기고 밥 먹자고 권한다. 우리가 식사하려고 할 때는 상관없다. 숟가락 하나 더 얹으면 되니까. 문제는 식사를 끝낸 후나 냉장고에 별다른 재료가 없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건물 청소하러 다니는 직원이 들르면 식사 때가 아니어도 그렇게 묻는다. 딱히 먹일 만한 게 없다고 하면 “라면이라도 끓여주지?” 한다. 남미에서 온 친구들에게? 다행히 이들은 입맛이 우리와 비슷해서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그래서 나는 남편의 “식사하셨어요?”라는 말이 겁난다.
우리가 자랄 때는 이런 일들이 당연했는데 요즘 한국에서는 이상한 일로 여기는 것 같다. 다행히 미국의 한인교회에는 서로 집으로 초대하는 문화가 아직 남아있다. 믿지 않는 가정에서 자라 결혼 후에야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남편에게도 어릴 적에 보아온 정다운 문화가 있어서 좋았을 것이다.
한인교회는 어디나 같이 모여 음식을 나누는 친교 문화가 잘 되어 있다. 이민 생활의 외로움 때문에 신앙보다는 사람이 그리워 교회를 찾는 일도 적지 않다. 고작 국과 밥에 김치가 전부지만 유학생들은 평소 먹기 힘든 정든 음식을 찾아 주일에 교회에 오기도 한다. 요즘 한국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집집이 돌아가며 하는 구역예배에서도 식당에서 음식 대접을 한다는데, 미국의 한인사회에서는 아직 따뜻한 옛 문화를 지키고 있어 다행이다.
흔히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다.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손님 초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집이 크거나 음식솜씨가 좋거나 시간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신혼 때부터 손님 초대를 했지만 그런 조건이 갖추어진 건 아니었다. 집은 컸지만 너무 낡아서 실제로 쓸 수있는 공간은 조그만 아파트 정도밖에 안 됐다. 내 음식솜씨로 말하면 스물셋에 결혼할 때까지 밥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백지상태였다. 난방비가 무서워서 응접실에 벽난로만 피우고 집안에서도 외투를 입고 지냈다. 사람을 재울 만한 침구도 변변히 없었다. 그런데도 친구나 친척을 겁 없이 초대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내 알량한 솜씨로 음식 대접을 했다는 게 신기하다. 너도나도 젊고 순진하던 시절이라 해주는 사람이나 먹는 사람이나 모이는 데 의미를 두었을 뿐, 음식이나 잠자리 불편 같은 건 문제가 안 되었던 것 같다.
그때 시작해 지금껏 우리 집에서 모이는 남편 친구들의 송년모임도 마찬가지다. 우리보다 더 큰 집을 가진 친구도 있고 음식솜씨가 뛰어난 집도 있지만 자리를 옮길 줄 모르고 우리 집에서 모이는 것을 보면, 좋은 조건이 손님 초대의 필수조건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사실 손님 초대는 하면 할수록 쉽고 안 하면 안 할수록 엄두가 나지 않는 그런 일인 것 같다.
이제 나는 손님 치르는 일에 이골이 나서 일단 겁을 내지 않는다. 손님 초대는 성공이다, 실패다, 정의를 내릴 수 없다. 좋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정성을 다하면 대부분 모이는 것 자체로 행복해한다. 그래서 초대하는 사람이 큰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 경우는 무사히 잘 치르고 손님이 떠났을 때의 뿌듯함이 더 크다. 이제껏 남을 초대하는 게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꼭 권하고 싶다. 일단 초대해 보시라고. 그러고 나면 그 특별한 기쁨을 알게 된다고 말이다.
컬럼비아 송년모임 (타운하우스 그림 있음)
1984년 가을, 시부모님의 도움으로 내 집 마련에 성공한 우리는 친구 중 유일하게 집을 가진 사람이었다. 1983년 봄, 대학원생 남편과 결혼하고 보니 친구 대부분이 학생이었고 결혼한 사람도 드물었다. 우리 결혼식에 받은 선물도 세 명이 모아서 산 30달러짜리 전기 프라이팬, 책상용 램프 같은 것들이었는데 그것도 가구점을 하시는 부모님 가게에서 들고 왔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아무튼, 다들 가난해서 어디서 밥 한 끼 먹는다면 기를 쓰고 나타날 때였다.
우리 집은 브루클린 아델파이 가(Adelphi St.)에 있는 5층짜리 타운하우스였는데 주민의 80%가 흑인이어서 우범지역이라고 알려진 곳이었다. 본래는 좋은 동네에 방 하나짜리 작은 아파트를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1800년 말에 지은 낡은 타운하우스를 같은 값에 사게 되었다. 그땐 몰랐지만, 우리의 손님 초대 본성이 영향을 주었던 것도 같다.
실제로 그 집에서 참 많은 사람이 자고 갔다. 특히 남편의 대학 절친 필재 씨는 당시 하버드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었는데 주말이면 차에 유학생들을 한가득 태우고 나타났다. 뉴욕에 짜장면 먹겠다고 내려오는 친구들을 우리는 반가이 맞았다. 한 끼는 짜장면을 사 먹었지만, 나머지는 내 알량한 솜씨로 밥을 해야 했다. 그땐 침구도 변변히 없었고, 음식도 할 줄 몰랐는데 어떻게 툭하면 네댓 명 장정이 먹고 자고 갔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지낸 친구들과 우리는 주고받는 정이 깊었다. 우리가 보스턴에 올라가는 일이 있으면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아이를 봐주었다. 한번은 발레 표를 사서 우리 둘만 보내주었던 일도 있었다. 일단 자기 가족이 생기면 남을 챙기는 여유를 잃어버리는 게 세상인심인데, 우리는 운이 좋아 지금도 몇몇 친구들과는 네 가족 내 가족 없이 한 가족처럼 지낸다.
대학 동기와 선후배들을 초대한 첫 컬럼비아 송년모임도 아델파이 집에서 시작됐다. 그게 1984년이니까 코로나 팬데믹 때 못 모인 것 빼고 서른다섯 해 동안 우리 집에서 계속해왔다. 여러 해 하다 보니 꾀가 나서 딱 한 번 식당을 빌려 모인 적이 있었는데 집에서 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냥 밥 먹고 헤어지자니 서운했고, 집에서처럼 야밤에 떡볶이를 한 냄비 해 먹으며 그치지 않는 대화를 이어갈 수도 없었다. 그게 매해 우리 집에서 송년 모임을 하는 이유다.
우리가 뉴저지에 살 때는 예기치 않게 폭설이 내린 적이 한두 번 있었다. 보통은 열둘에서 많을 때는 스무 부부 가까이, 아이들이 어릴 땐 온 가족이 함께하는데 폭설이 내리면 많이들 못 왔다. 개중에는 롱아일랜드에서 목숨 걸고 날아온(?) 친구도 있긴 하지만…. 어느 해인가는 사업상 제설차를 가지고 있는 친구가 우리 집 주위의 눈을 치워준 적도 있다. 주차를 못 하면 아무도 올 수 없다면서. 이렇게, 어떻게든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이유는 그날 나타나지 않으면 아주 친한 사이끼리 말고는 다음 송년회까지 서로 만나기 힘들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제 청춘도 갔고 더는 가난하지도 않지만, 환갑 전후가 되니 배고프던 시절 못지않게 열심히 모인다. 일찍 일어나서 가는 사람도 드물다. 옛친구가 그리워서다. 매번 똑같은 얘기를 되뇌어도 처음 듣는 것처럼 재밌게 들어준다, 같은 추억을 가진 친구끼리 20대의 철없던 시절로 돌아가 그때의 말투로 서로 놀려대며 좋아라 할 친구들이 어디 그리 많겠는가. 팬데믹이 끝나고 다시 모이면 감회가 클 것 같다. 어릴 때 친구가 얼마나 좋은지, 서로에게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새삼 실감하리라. 펜데믹으로 모임을 쉬어보니 그리 나쁘지 않아서 나도 슬슬 꾀부릴 때가 됐나 보다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니다. 인생에서 이렇게 길게 이어지는 친구들이 있다는 건 크나큰 행운 아닌가. 소중히 이어가고 싶다.
대가족의 부활, 옥스포드 디너클럽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오랫동안 못 모인 옥스포드 디너클럽(Oxford dinner Club)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뉴저지에서 브루클린으로 이사하고 나서 우리는 제 부모와 떨어져 살고 있는 근처의 조카와 친구네 아이들을 불러 밥을 먹이기 시작했다. 옛날 우리 자랄 때처럼 형제가 많지 않고 친척들이 자주 모이는 것도 아니어서 우리 아이들이라도 그런 대가족의 북적거리는 다정함을 맛보고 살았으면 싶었다. 뉴저지 살 때도 그런 생각을 했으나 시내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오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려서 생각만 하고 실행하지 못했다. 어느 날 조카 몇이 모인 자리에서 제안했다. 한 달에 한 번 밥 먹으러 모이겠냐고. 모두 기다렸다는 듯 찬성이었다. 내친김에 그 자리에서 우리 집 주소를 따서 옥스포드 디너 클럽이라고 이름 붙이고 정기적으로 모였다.
거의 빠지지 않고 모이는 멤버는 브루클린 사는 큰아들 부부, 역시 한동네에 사는 조카 부부와 또 다른 조카 둘, 참새같이 재재거리며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남편 친구 딸 카밀라와 남자친구 폴, 얼굴도 마음같이 이쁜 시집 조카 희성이와 아담, 대충 쳐도 금방 열이 된다.
집이 멀어 가끔 오는 멤버는 워싱턴 DC에 사는 둘째 아들 부부와 막내, 그리고 보스턴에 사는 딸이다. 이 애들이 출동할 때는 날짜를 조정하거나 한 번 더 모인다.
특별 멤버도 있다. 뉴욕에서 인턴을 하느라 여름 두 달 동안 우리 집에 살았던 기용이, 브루클린에 사는 남편 대학 동창 딸 나탈리와 친구 프레디, 내 친구 딸 선아와 약혼자 앤드루, 남편 후배 딸 엘리와 사라, 사촌 언니 친구 딸 정원이, 동네 필라테스 교실에서 우연히 만난 크리스티나와 사돈총각 크리스까지, 다 모이기라도 하는 날이면 완전 잔칫집이다.
조카들 말고도 우리 집에 모이는 젊은이들이 우리를 삼촌! 이모! 하고 부르니까 이제는 모두 친조카 같다. 아이들은 와인이나 케이크를 사 오기도 하고 예쁜 꽃다발을 들고 나타날 때도 있다. 남편은 아이들이 한 상 가득 둘러앉아 웃고 떠드는 모습을 상머리에서 흐뭇하게 바라본다. 아이들끼리도 오래 만나면서 친형제처럼 친해졌다. 요즘 한국에서는 자녀를 한둘만 낳아 공주나 왕자처럼 키운다는데, 부모가 떠난 후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싶다. 비록 남이지만 형제 같은 친구가 많다면 평생 든든하지 않을까?
같이 밥 먹자고 모였지만 이 모임은 음식이 주가 아닌 것 같다. 여자친구나 남자친구가 생기면 선을 보이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어떤지 좀 봐 달라는 건지, 좋아서 자랑하고 싶은 건지, 아무튼 아이들은 사귀는 사람이 있으면 “한 명 추가요!”라며 데리고 온다. 이렇게 한두 번 왔다가 사라지는 친구도 있고 계속 오는 친구도 있다. 그냥 남사친, 여사친을 데리고 오는 일도 더러 있다. 미리 알려만 주면 누구든 환영하는 게 옥스포드 디너클럽이다.
언젠가 조카 주서가 여자친구 에밀리(Emily)를 데려왔는데 첫눈에 쏙 들었다. 내 바로 아래 동생의 아들인 이 조카는 뉴욕에 살면서 우리 아이들과 친형제처럼 자랐다. 여행도 많이 갔고 방학도 같이 보냈다. 우리가 조카의 여자친구를 싫어한다 해도 아무 의미 없지만, 만일 좋아하면 상황은 조금 달라진다. 부모가 타지에 있는 경우, 우리가 먼저 조카며느리 감을 통과시킨 경험이 벌써 두세 번 된다. 에밀리를 처음 본 날, 우리는 그에게 만점을 주었다. 오래전에 알던 것처럼 다정하고 친근했고, 우리 집 못지않게 많은 사촌과 어울리며 자라서인지 성격이 아주 좋았다.
3년 후 에밀리는 조카며느리가 되었다. 그리고 신혼살림을 우리 큰아들 집 아래층에서 시작했다. 사촌끼리 한 건물에서 같이 아기를 낳고 기르게 되었으니 이제 손자 손녀들도 우리가 꿈꾸는 대가족의 따뜻함을 대물림해 누리게 되었다.
팬데믹 이후 거의 1년 반 만에 옥스포드 디너 클럽이 다시 모였다. 이날 브런치엔 평소보다 많은 멤버가 왔다. 팬데믹을 겪으며 생긴 현상 중 하나가 부르면 잘 나타나고, 모이면 헤어지려 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 만나는 기쁨이 전에 비해 크다고 해야 하나? 12시까지 오라고 했는데 다른 때보다 시간도 잘 지켰다. 순식간에 크지 않은 응접실이 꽉 찼다. 인원이 많아서 테이블 양쪽에 의자 대신 벤치를 놓고 바투바투 붙으니 기적처럼 다 앉을 수 있었다. 그중 몇 명은 처음 만나는 사이라 돌아가면서 대충 인사를 시켰다. 그래도 우리와 연결고리가 있어 아이들은 금방 친해진다.
이날은 특별한 일이 있었다. 처음으로 남편 동창 아들과 내 동창 딸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하는 뚜쟁이 역할을 한 것이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가만 보니 그 둘이 만날 약속을 하는가 보다. 어쨌든, 오랜만에 우리 집은 몇 시간 동안 시끌벅적했다. 잔잔하게 틀어놓은 재즈는 들리지조차 않았다. 남편은 그날도 예외 없이 자기 얼굴을 크게 앞쪽에 넣고 인증샷을 찍었다. 나는 얼굴이 작아 보이는 맨 뒷자리에 앉았다.
아이들이 돌아갈 때는 문가에서 서로 인사하는 데만 또 30분이 걸렸다. 아이들이 올 때도 반갑지만 집에 돌려보낼 때도 묘한 뿌듯함이 있다. 집 떠나 사는 자식에게 배부른 한 끼 잘 먹여 보냈을 때의 안도감이랄까. 다들 돌아가고 나니 오랜만이라 그런지 피로가 몰려왔다. 나중에 힘들어 못 하게 될 날이 오면 어쩌나, 살짝 걱정되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더 자주, 아이들을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늙고 힘없을 때
워낙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 먹는 걸 즐기는 남편은 언제나 밥 사줄 사람을 찾는다. 유난히 가리는 것도 많고 못 먹는 것도 많은 나와 살다 보니 여럿이 가야 이것저것 시킬 수 있고, 내가 안 먹는 요리도 맘껏 먹을 수 있는 까닭이다. 남편이 은퇴한 후론 주변 누군가를 불러 집이나 식당에서 밥을 먹이는 게 부업처럼 된 지 오래다. 그 수혜자(?)는 주로 우리가 돌보고 있는 조카들과 수양 조카들이 된다. 밥만 사주는 게 아니라 헤어질 때쯤은 용돈 봉투도 딸려 간다.
1970년대에 이민 온 시댁 어른들은 용돈을 아주 잘 주신다. 이민자들은 고국을 떠날 당시의 문화나 관습을 그대로 지키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 집 문화도 한국의 70년대라고 보면 된다. 남편은 어릴 때 용돈 받던 때의 기쁨을 지금도 세세히 기억하고 있어서 조카들에게 그것을 나누어주는 것이다.
남편이 툭하면 용돈 주는 인기 많은 아저씨지만, 자기 나름의 규칙은 있다. 취직해 돈을 벌 때까지만 주는 것이다. 나이가 많아도 놀고 있으면 용돈을 준다. 친조카뿐 아니다. 친한 친구 자녀나 뉴욕에 처음 온 경우에도 으레 봉투가 등장한다. 이런 남편에게 아이들은 감사 인사를 하는데, 그럴 때마다 농담으로 하는 대답이 늘 똑같다.
“Remember me, when I’m old and feeble.”
“나중에 내가 늙고 힘없을 때, 오늘을 나를 잊지 말아라.”
친정어머니가 생전에 하시던 조언 중에 남편이 크게 공감해서 실천하는 것 중 하나가 “친구는 한 10년 아래를 사귀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난히 건강하셨던 엄마는 80대가 되셨을 때 많은 친구가 거동이 불편하거나 앞서가셔서 만날 친구가 별로 없으셨다.
엄마 말씀처럼 우리가 노후를 위해 주변 아이들을 챙기고 먹이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 역전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그동안 챙겨온 조카들이 취직해 돈을 벌고 하나둘 시집 장가를 가더니, 우리에게 밥을 사는 것이다. 처음에는 감격스러웠는데 심심찮게 대접을 받으니 대견하고 뿌듯하다. 집 근처에 사는 조카 주서와 에밀리는 가끔 지나다 들렀다면서 우리와 왕수다도 나누고 가는데, 이제는 그냥 다 인생 친구라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영어엔 존댓말이 없고 서로 이름을 부르다 보니 자식 같은 아이들과도 친구처럼 지내게 된다. 우리가 늙고 힘없을 때 누가 우리를 찾아줄까 싶지만, 우리의 목표가 죽는 날까지 밥 한 끼 사는 것이니 덜 외롭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반말과 존댓말
우리말에는 엄연히 반말과 존댓말의 구분이 있다. 손윗사람에게는 물론이고 나이가 비슷해도 어지간히 친하지 않으면 존대하기 마련이다. 특히 나 같은 사람은 아무리 가까워져도 반말로 바꾸기가 꽤 어렵다. 그래서 때론 영어가 편하다. 존칭이 없어서 젊은 친구들과 나이 상관없이 친구처럼 지낼 수 있고, 사돈같이 어려운 관계도 서로 이름을 부르니 한국의 사돈지간보다 친근하게 느끼게 된다.
우리가 다니는 호프 브루클린 교회는 교인들 평균 나이가 30대 초반 정도 되는 것 같다. 뉴욕의 인구 분포와 비슷하게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는 다문화 교회로 한인 2세 젊은 부부도 몇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 구역의 구역장 비슷한 직분을 맡은 그레이스와 조나단 부부는 우리 아이들 또래인데도 아주 친하다. 처음 만났을 때, 방 하나짜리 조그만 아파트에 사는 젊은 부부가 금요일마다 열 명이 넘는 구역 식구들을 불러 저녁 대접을 하는 걸 보고는 내심 기특해했다. 알고 보니 그레이스의 아버님은 한인교회를 섬기셨던 목사님이고, 남편 조나단은 신앙 좋은 중국 교포 청년이다.
그레이스네 집은 마침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다. 그들을 처음 우리 집에 초대했을 때 얼마나 서로 재미있게 대화했는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런 이후로 이 부부는 그냥 아무 일 없이 들러서 차도 마시고 아침도 같이 먹고 한다. 한번은 우리가 여행 갈 때 강아지 리오를 며칠간 맡아준 일도 있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주 맛있는 버터를 사다 주었더니 좋아한다.
나이 차이 30년을 무시하면 우린 그냥 친구다. 가끔은 뜬금없이 이런 생각을 한다. 만일 우리가 서로 존대하는 사이였다면 지금처럼 지낼 수 있었을까? 아무래도 거리감이 있었을 것 같다. 우리 문화는 존칭 때문인지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과 친구같이 지낸다는 게 낯설게 느껴지는 것 같다. 우리말이 서툰 한인 2세들, 조카와 친구의 아이들과 어쩔 수 없이 영어로 소통해야 하는 게 세대 차이를 조금 덜 느끼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젊은이들이 나이 지긋한 우리 부부와 어울려 준다는 게 내심 고마울 따름이다. 그 보답으로 지갑은 부지런히 열어야 하겠지만….
호프 교회
브루클린으로 다시 이사 오고 나서 우리는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뉴저지에서는 한인교회에 다녔지만, 굳이 그럴 것 없이 나중에 아이들도 같이 다닐 수 있는 다문화 교회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브루클린에 집을 사서 수리할 때 안식년으로 잠시 우리 집에 머물고 계시던 목사님을 모시고 공사현장을 둘러보러 갔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아, 명당에 집을 사셨네요” 하시는 거다. 알고 보니 우리 집 길 건너에 감리교회가 있었는데 한국에 언더우드(Underwood) 선교사를 파송한 바로 그 교회라는 것이다. 나중에 보니 한국감리교단에서 증정한 감사패가 교회 사무실에 걸려 있었다. 언더우드 집안은 언더우드 타자기로 부자가 된 집이다. 우리 집에서 조금 걸어가면 그분들의 이름을 딴 언더우드 공원도 있다. 우리는 잘됐다 싶어 그 교회에 나갔는데 우리가 찾던 교회가 아닌 것 같아 오래 다니지는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큰아들 결혼 주례를 해주신 두루 현(Drew Hyun) 목사님이 연락하셨다. 이민 2세인 현 목사님이야말로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분이다. 사모님도 사교적이어서 우리와 스무 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데도 친구처럼 지낸다. 불쑥 햄버거를 같이 먹자고 하거나, 아이들과 우리 집에서 놀다가 주무시고 간 일도 있다.
현 목사님이 잠깐 들러도 되겠냐고 하셔서 다과를 준비하고 기다렸더니 젊은 미국 목사님을 모시고 오셨다. 현 목사님이 시작한 독립 교단인 호프 교회(Hope Church)를 브루클린에도 개척하기 위해 교회 건물을 보러 다니신다고 했다. 같이 오신 러셀 조이스(Russel Joyce) 목사님은 교단이 달랐으나 그 교단에서 재정지원을 해주는 것 같았다. 복음이 전파되기만 한다면 동역하는 데 조건을 붙이지 않고, 간섭하거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게 좋아 보여 무엇이든 돕고 싶었다. 우리는 개척교회에 대해 잘 몰라 궁금한 마음에 어떻게 시작하는지 물어보았다.
“아, 보통은 가정집에 모여 그야말로 떡을 떼면서 시작합니다.”
그 말에 자동으로 내 손이 번쩍 올라갔다.
“밥 먹이는 거면 우리가 할 수 있어요!”
그렇게 우리 집에서 개척교회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식사 대접을 하기로 했는데 관심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교인이 스무 명 넘게 모이자 동네의 노숙자교회 지하를 빌려 모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돌아가면서 음식을 했다. 그렇게 작게 시작한 교회가 3~4년 만에 300명 넘는 교회로 성장했다.
교회를 시작할 때 러셀 조이스 목사님 나이가 스물일곱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교인 평균 나이가 한 서른이나 되나 싶게 젊었다. 부모뻘도 넘는 우리는 거기서 전혀 어울리지 않게 튀었다. 한번은 우리 나이쯤 되는 분들이 오셔서 좋아했더니 웬걸, 전도사님 부모님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겉돌지 않고 적당히 어울릴 수 있었던 건 교회 시작부터 1년 동안 새 신자를 위한 식사를 차렸기 때문이리라. 보통 10~15명 정도 모였는데, 우리는 교인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해도 음식을 먹고 간 사람들은 우리를 잘 기억했다. 그래서 교회에 가면 많은 이가 말을 걸어와 우리만 나이 들었다는 느낌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선교는 감히 내 영역이 아니지만, 밥은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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